국내 증권·운용사들이 저성장 늪에 빠진 내수 시장을 넘어 베트남과 인도 등 아시아 신흥국으로 빠르게 진출하고 있다. 새로운 수익원을 확보하려는 생존 전략의 일환이다. 조선비즈는 아시아 현지 시장의 구조적 변화와 국내 금융사별 진출 모델, 현지화 전략을 데이터 중심으로 분석해볼 예정이다. 아울러 정부의 정책 지원이 실질적인 비즈니스 성과로 이어지는지 진단하고, 리테일부터 기업금융(IB)까지 아시아 현장에서 포착된 '넥스트 웨이브(Next Wave)'의 실체를 짚어본다. [편집자주]
국내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들이 포화 상태인 내수 시장을 넘어 글로벌 영토 확장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베트남, 인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신흥국은 견조한 경제 성장세와 두터운 젊은 인구층을 바탕으로 폭발적인 리테일 수요가 기대되는 '포스트 차이나'의 핵심 거점으로 꼽힌다.
이 같은 증권사들의 아시아 신흥국 진출 행보는 단순히 외형을 키우는 차원을 넘어, 저출산·고령화로 활력을 잃어가는 국내 자본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국내 시장이 '규모의 경제'에서 '수익성 방어'로 국면이 전환된 상황에서, 아시아 신흥국의 폭발적인 성장 엔진을 공유해 지속 가능한 수익 구조를 구축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 베트남, 리테일·VIP 고객 공략… 20년 현지화 결실
베트남은 2000년대 초반부터 한국계 증권사들이 전략적으로 선점해온 전초기지다. 2007년 베트남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금융 시장이 개방되면서 자본 유입이 본격화됐고, 최근에는 리테일 고객의 신용공여 수요와 고액자산가(VIP) 시장이 급격히 팽창하고 있다. 한국이 베트남 내 최대 외국인직접투자(FDI)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호재다.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과의 시너지는 물론, 한국 금융사에 우호적인 베트남 당국의 기조를 바탕으로 사업 다각화에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국내 증권사들은 약 20년간의 현지화 전략을 통해 시장 안착에 성공했다. 지난해 3분기 기준 베트남 87개 증권사 중 미래에셋증권 베트남법인은 시장 점유율 2.93%로 8위를 기록했다. 한국투자증권(KIS) 베트남법인은 점유율 2.90%로 10위에 올랐다. 상위 7개 로컬 증권사가 시장의 약 60%를 점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외국계 증권사로서 거둔 의미 있는 성과다.
최근 증권사들은 리테일 기반의 디지털 전략으로 차별화에 나섰다. 미래에셋증권 베트남법인은 지난해 말부터 인공지능(AI) 챗봇 'MASA 리서치'를 탑재한 앱을 통해 24시간 투자 분석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신한투자증권은 기업금융(IB)과 커버드워런트(CW·주식 워런트 증권) 사업을 확대하는 동시에 차세대 시스템 도입으로 디지털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KB증권 역시 CW 시장 진출과 기관 영업 확대에 집중하며 수익원 다변화를 꾀하는 중이다.
미래에셋증권 모바일 트레이딩 시스템(MTS) 이용자인 응우옌 하 린(Nguyen Ha Linh)씨는 "사용자 환경(UI)이 직관적이고 반응 속도가 빠른 편이라 모바일 거래에서 크게 불편함이 없다"며 "실시간 시세, 뉴스, 공시 등이 잘 연동되고, 초보자도 금방 적응할 수 있을 만큼 가이드가 잘 돼 있다"고 말했다.
◇ '동남아 최대 시장' 인니… '개미 군단' 잡는 K-플랫폼
인도네시아는 국내 증권사들이 디지털 기술력을 앞세워 리테일 사업 확대하는 핵심 시장이다. 2억8500만명의 거대 인구를 보유한 동남아 최대 시장임에도 주식 투자자 비율은 여전히 낮아 성장 잠재력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현재 미래에셋증권, 한국투자증권, NH투자증권, KB증권, 키움증권, 한화투자증권 등이 진출해 치열한 순위 다툼을 벌이고 있다.
특히 키움증권은 현지화 전략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2010년 현지 증권사 인수를 통해 진출한 키움증권은 한국의 '영웅문'을 현지화한 홈트레이딩시스템(HTS) 'HERO'를 선보였다. 2024년 8월에는 신규 플랫폼 확장과 함께 일일 최대 계좌 유치 기록을 세우며 인도네시아 세계 기록(MURI) 인증을 받는 진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플랫폼 출시 이후 현재까지 누적 3만개 이상의 신규 계좌를 확보하며 가파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올해 키움증권은 '헤비 트레이더'(하루 거래량이 많은 투자자) 육성에 주력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소득 양극화가 뚜렷한 시장인 만큼, 수수료 수익을 이끌어낼 핵심 고객층을 집중 공략하겠다는 것이다. 키움증권 관계자는 "당사의 '영웅 고객' 기준을 현지에 맞게 재정의하고, 한국 본사 글로벌전략팀·플랫폼 전략팀 등과 유기적으로 협업 중"이라고 말했다.
◇ 인도·싱가포르 '투자 요충지' 부상… 미래에셋쉐어칸, 승부수
싱가포르 역시 국내 증권사들의 진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곳이다. 해외 유입 자금이 풍부하고 운용 인프라가 우수하다는 점에서 아시아 지역의 투자 요충지로 꼽힌다.
현재 미래에셋증권, NH투자증권, 한국투자증권, 하나증권, 대신증권, 한화투자증권, 키움증권 등이 싱가포르에 진출했다. 지난해 9월에는 토스증권이 싱가포르에 '토스증권 글로벌'을 세워 지주회사 역할과 함께 글로벌 확장의 거점으로 삼았다.
한국 증권사들이 주목하고 있는 또 다른 시장은 인도다. 젊은 인구 구조와 높은 경제 성장률, 모바일 금융 인프라 확대, 정부의 개방 정책 등이 맞물리며 인도는 '핵심 전략지'로 부상하고 있다. 인구 14억명이 넘는 인도는 다른 동남아 국가보다 더욱 큰 성장 가능성을 갖춘 시장으로 꼽힌다.
가장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는 곳은 미래에셋증권이다. 2024년 현지 증권사 쉐어칸 인수를 마무리하고 '미래에셋쉐어칸'을 출범시키며 현지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성과는 수치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미래에셋쉐어칸의 자산관리(WM) 부문 순자산(AUM)은 인수 직후 대비 11% 증가했고, 계좌 수는 533만개에서 612만개로 15% 늘었다.
수익성도 가파른 회복세다. 세전 순이익이 2025년 1분기 84억원, 2분기 63억원에서 4분기에는 180억원까지 치솟으며 뚜렷한 우상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미래에셋증권 관계자는 "인도에서는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상장지수펀드(ETF) 판매 확대 등 그룹 차원에서 협업하며 종합 금융 플랫폼으로 확장하고 있다"며 "현지 법인과 그룹 계열사 간의 시너지 효과가 가시화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