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른 랠리를 이어가던 금과 은 가격이 각각 10%, 30%대 폭락했다. 케빈 워시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이사가 차기 연준 의장으로 지명되면서 통화정책 완화에 대한 기대가 급격히 약화된 영향으로 풀이된다.
시장에서는 워시 차기 의장의 긴축 성향을 고려할 때, 금과 은을 포함한 무수익 자산 전반의 투자 매력이 장기적으로 훼손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일 인베스팅닷컴에 따르면 은 선물 가격은 지난달 30일(현지 시각) 전 거래일 대비 31.4% 급락한 온스당 78.531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1980년 3월 이후 하루 기준 최대 낙폭이다. 같은 날 뉴욕상품거래소에서 거래된 금 선물(4월물) 가격도 온스당 4745.1달러로 전장보다 11.4% 급락했다.
이번 급락의 직접적 계기는 워시 전 연준 이사의 의장 지명이다. 당초 시장에서는 비둘기파로 분류되는 케빈 해싯 후보가 지명될 것이라는 기대가 우세했다. 이에 금리 인하 가능성을 선반영한 자금이 금·은 시장으로 몰리면서 가격을 끌어올렸다.
특히 해싯 후보가 지명될 경우 연준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영향권에 놓일 수 있단 우려가 커지면서, 연준의 통화정책과 달러에 대한 신뢰가 약화됐다. 이 과정에서 무위험·무수익 자산인 원자재 가격이 급등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워시 전 이사가 최종 낙점되면서 시장 분위기는 급변했다. 워시는 연준 이사 재임 시절부터 양적 완화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해온 인물로, 물가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다소 매파적 성향으로 평가된다.
시장에서는 워시 체제의 연준이 향후 공격적 금리 인하나 대규모 자산 매입에 나설 가능성이 제한적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달러 가치와 실질 금리가 동시에 상승하며, 원자재 가격에는 즉각적인 하방 압력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질 금리가 오르면 이자가 없는 금과 은은 상대적으로 불리하다. 금과 은은 대표적인 무수익 자산으로, 금리 상승기에는 보유에 따른 기회비용이 확대된다. 현물 투자는 보관·보험 비용이 발생하고, 선물 투자는 이자 비용 부담이 늘어나는 식이다. 이에 은 대신 국채나 예금 등 이자를 제공하는 자산으로 자금이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최근 금·은 가격이 단기간 급등한 점도 폭락 배경으로 꼽힌다. 조병현 다올투자증권 연구원은 "지난해 금 가격은 나스닥 대비 상대 수익률이 높았고, 은이 금의 상승세를 압도하면서 가격 부담이 커진 상태였다"며 "이 상승세를 뒷받침하던 과도한 유동성 공급과 화폐가치 하락 기대가 약화되고, 가격 자체 부담까지 더해진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가격 부담이 누적된 가운데 은 선물 거래에 대한 증거금이 수차례 인상되면서, 마진콜(증거금 추가 납부 요구)에 따른 강제 청산 물량이 대거 출회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서상영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시카고상품거래소(CME)의 연속적인 증거금 인상과 실물 은 부족으로 선물과 현물 가격 간 괴리가 확대되면서 고레버리지 포지션 유지가 어려워졌다"며 "금·은 가격 급락은 이를 담보로 활용하던 펀드들의 담보 가치 하락으로 이어졌고, 자동적인 마진콜이 발생했다. 특히 알고리즘 매매 중심의 매도세도 급락에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여기에 중국발 수급 요인도 영향을 미쳤다. 옥지회 삼성선물 연구원은 "1월 30일 중국 본토에서 유일한 은 선물 투자펀드인 UBS SDIC Silver Futures Fund가 투자 열기 과열을 이유로 하루 동안 거래가 중단됐다"며 "은 펀드에 신규 자금이 들어오면 그만큼 은 선물을 추가 매수해야하지만, 거래 중단으로 중국발 매수 자금이 유입되지 않은 영향이 크다"고 짚었다.
국내 투자자들의 손실도 적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탁결제원 세이브로에 따르면, 지난달 24일부터 30일까지 한 주간 서학개미가 가장 많이 순매수한 해외 주식은 '아이셰어즈 실버 트러스트(iShares Silver Trust)' 상장지수펀드(ETF)로, 순매수 규모는 약 1억5000만달러에 달했다. 이는 같은 기간 알파벳, 아이온큐, 테슬라를 웃도는 수준이다. 현재 해당 ETF는 마지막 거래일 기준 28.54% 폭락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급락이 단순한 가격 조정을 넘어 은의 투자 매력 자체를 장기적으로 훼손할 가능성도 있다고 경고한다. 새 연준 의장 체제에서 통화정책이 긴축 기조로 재편될 경우, 무수익 자산의 보유 비용이 구조적으로 상승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신승진 삼성증권 투자정보팀장은 "실질 금리 상승은 이자 수익이 없는 자산의 상대적 매력을 떨어뜨리고, 자금이 수익성 자산으로 이동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다만 워시 차기 의장이 트럼프 정책을 일정 부분 지지하는 면도 있어, 현재의 긴축 우려가 과도하게 반영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