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를 해소하고자 기업 밸류업(가치 제고) 프로그램을 도입한 가운데 다른 한편에서는 스스로 상장 자격을 포기하는 회사가 늘고 있다. 시장에서는 과도한 주주 제안과 공시 의무, 최대주주에 대한 지나친 역차별 규제 등에 부담을 호소하는 상장사가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들은 주주 친화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상장사가 한국 증시에 계속 머물고 싶게끔 당근도 적절히 공급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러스트=박상훈

◇ “주주 제안 남발 못 막고, 공시 부담도 너무 커”

2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들어 이달 1일까지 공개 매수를 통해 자진 상장 폐지를 추진한다고 공시한 상장사는 총 7곳이다. 2022년과 2023년에는 자진 상장 폐지 공시가 1년 동안 각각 3·4건이었는데, 2024년에는 상반기에만 그 두 배가량의 회사가 주식시장에서 발을 빼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분위기라면 연말에는 자진 상장 폐지 기업이 두 자릿수로 늘어날 수 있다.

현재 락앤락(115390), 신성통상(005390), 쌍용C&E(003410), 제이시스메디칼(287410), 커넥트웨이브(119860), 티엘아이(062860) 등 6개사가 상장 폐지 목적의 공개 매수를 진행하고 있다. 앞서 대양제지는 공개 매수를 거쳐 지난달 주식시장에서 이탈했다. 유가증권시장 기준 대주주가 회사를 상장 폐지하려면 지분을 95% 이상 보유해야 한다. 이 지분율을 충족하기 위해 기존 주주로부터 공개적으로 주식을 사 모으는 과정이 공개 매수다.

시장 관계자들은 자진 상장 폐지 시도가 올해 유독 늘어난 배경으로 상장사를 둘러싼 각종 규제를 꼽는다. 예컨대 한국의 주주총회 결의 요건은 주요국과 비교해 매우 엄격한 편이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상장협)가 ‘발행 주식이 총 100주인 회사의 주총 결의에 필요한 최소 찬성 주식(보통주) 수’를 비교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은 25주가 필요하다. 미국(1주)·일본(1주)·영국(2주)·중국(1주)은 물론 프랑스(11주)와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많다.

주주 제안 남용도 상장사가 한국 증시의 매력을 점점 잃는 배경으로 꼽힌다. 주주제안권은 주주의 정당한 권리지만, 정부가 2020년 상법 개정을 통해 문턱을 확 낮춘 탓에 기업으로선 과도하거나 억지스러운 제안이 와도 일단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여건에서 추진된 밸류업 프로그램은 소액주주와 행동주의 펀드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줬다.

상장사들은 날로 커지는 공시 의무도 부담이라고 호소한다. 상장사와 같은 사업보고서 제출 대상 법인은 사업연도 개시일부터 3·9개월간의 사업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한 코스피 상장사 고위 관계자는 “ESG를 포함해 공시 항목이 계속 늘고 있어 기업으로선 부담이 크다”며 “기업 환경이 빠르게 바뀌는 만큼 분기보고서 제출 의무와 관련해서도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했다.

상장법인의 감사·감사위원 선·해임이나 집중투표 관련 정관 변경(자산 2조원 이상) 시 대주주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3% 의결권 제한’도 기업이 한국 증시의 매력을 상실하는 대표적 규제로 꼽힌다. 상장협 측은 “최대주주에 대한 지나친 역차별 규제는 상장 부담·기피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며 “더 나아가 우리 자본시장의 활성화를 저해할 것”이라고 했다.

조선DB

◇ 사모펀드 중심의 증시 이탈 조짐… 소액주주는 발끈

자진 상장 폐지는 대주주가 사모펀드(PEF)인 기업에서 특히 더 활발하다. 올해 스스로 상장을 철회하겠다고 밝혔거나 이미 상장 폐지한 기업 7곳 가운데 락앤락(어피너티), 쌍용C&E(한앤컴퍼니), 제이시스메디칼(아키메드), 커넥트웨이브(MBK파트너스) 등 4곳은 대주주가 사모펀드다. 기업 경영과 관련해 투명한 공개를 꺼리는 사모펀드 특성상 밸류업 압박에 따른 부담을 더 크게 느낀다는 분석이 나온다.

사모펀드 입장에선 상장사를 인수한 뒤 자진 상장 폐지하면 주주 간섭에서 벗어나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고, 행동 하나하나를 공시해야 하는 부담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주주들은 반가울 리 없다. 공개 매수 가격이 개별 주주의 매입가보다 낮은 경우가 많아서다. 현재 락앤락 소액주주들은 락앤락 대주주인 어피너티가 제시한 공개 매수 가격이 너무 낮다며 저지를 위한 지분 결집에 나섰다. 공개 매수 목표치에 미달한 어피너티는 올해 락앤락 배당을 하지 않겠다고 밝히며 공개 매수에 응하지 않는 주주에게 ‘지분을 팔라’고 압박하고 있다.

커넥트웨이브 소액주주 역시 커넥트웨이브 대주주인 MBK파트너스가 주가를 일부러 떨어뜨렸다고 주장하며 로펌 선임에 나서기도 했다. 소액주주 반발에 MBK도 목표 지분율에 못 미쳤지만, 상장 폐지를 해내기 위해 포괄적 주식 교환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그간 20%대 배당 성향을 유지했던 커넥트웨이브의 배당은 2021년부터 중단한 상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부의 밸류업 시도가 소액주주 권익을 고려하지 않는 자진 상장 폐지 부작용으로 이어지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강형구 한양대 파이낸스경영학과 교수는 “주가가 저평가 상태라고 판단해 비상장사로 만들어 재평가받으려는 건 이해할 수 있다”면서도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이해당사자가 나중에 재상장하거나 팔면 피해는 고스란히 소액주주에게 돌아간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