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정기 주주총회 시즌이 본격화한 가운데 행동주의 펀드와 소액 주주를 중심으로 자사주 소각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상장사가 자사주를 소각하면 기존 주주의 지분 가치가 상승한다. 가장 확실한 주주환원 정책으로 꼽히는 이유다.

그러나 기업들은 주주 기대만큼 자사주 소각에 나서진 않는 모양새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자사주 소각 계획을 발표하고 있긴 하나, 소각 규모를 축소하는 경우가 많다. 또 상대적으로 소각보다는 배당을 선호하는 분위기다. 경영권 방어나 자금 확보에 자사주를 동원할 수 있어서다. 자사주 소각이 부채비율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점도 기업에는 부담이다.

일러스트=챗GPT 달리3

24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올해 주총 시즌을 앞두고 국내 상장 증권사 23곳 중 자사주 소각을 결정한 증권사는 미래에셋증권(006800)NH투자증권(005940), 키움증권(039490) 등 3곳에 불과하다. 증권은 대표적인 밸류업 수혜 업종으로 꼽힌다.

자사주 소각은 기업이 시중에 유통되는 주식을 취득한 뒤 없애버리는 행위다. 이 경우 발행 주식 수가 감소해 주당 가치가 높아지게 된다. 투자자 입장에선 보유 종목의 주가가 상승해 직접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적극적인 자사주 매입·소각으로 주가 부양에 성공한 회사로 미국 애플이 종종 거론된다. 미 금융정보업체 팩트셋에 따르면 애플은 2012년부터 2022년까지 10년간 자사주 매입·소각에만 5720억달러(약 756조원)를 투입했다. 이 기간 애플 주가는 14달러에서 180달러로 13배 가까이 치솟았다.

국내에서도 정부의 기업 밸류업(가치 제고) 프로그램 도입 추진과 함께 자사주 소각을 결정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하지만 주주 요구 수준에 흔쾌히 응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일례로 삼성증권(016360)대신증권(003540)은 배당 확대에는 적극 나서고 있긴 하나, 최근 10년 동안 자사주는 소각하지 않았다.

소각은 하되 규모를 줄이기도 한다. 이달 22일 금호석유화학 주주총회에서 행동주의 펀드 차파트너스자산운용은 금호석화가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자사주를 전량 소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호석화는 자사주 소각 요구에 응했다. 다만 소각 규모는 차파트너스가 요구한 전량이 아닌, 절반이었다.

재계 2위 SK(034730)는 약 1200억원의 자사주를 소각할 예정이다. 최정욱 하나증권 연구원은 그러나 “시장의 관심은 SK C&C와 합병 과정에서 발생한 자사주 약 1800만주(24.6%)의 소각 여부”라며 “전량 소각 시 5000억원 내외의 세금이 발생하지만, 분할 소각 등을 통해 부담을 완화할 수 있다”고 했다.

기업 입장에서 자사주는 경영권 방어, 자금 확보 등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는 카드다. 주주환원 효과를 알더라도 소각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자사주는 적대적 세력에 대항해 경영권을 방어하는 무기가 될 수 있고, 인수합병(M&A)이나 임직원 성과 보상 시 현금 대용이 될 수도 있다”며 “아무래도 소각보다는 배당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자사주를 소각하면 자기자본이 줄어 부채비율이 높아진다는 단점도 기업으로선 부담이다. 부채비율은 자기자본 규모 대비 총부채 비중을 의미한다. 타인 자본에 대한 의존도와 재무 안전성을 가늠하는 대표적 지표로, 200%를 넘으면 위험하다고 본다. 재계 관계자는 “저평가주로 주목받은 상당수 종목이 자사주 소각에 소극적인 주된 이유”라고 했다.

이달 19일 정부는 직전 연도보다 배당을 크게 확대하거나 자사주 소각 규모를 늘린 기업의 법인세를 감면하겠다고 했다. 고배당 기업 주주의 배당소득세율을 현행보다 낮게 부과하고, 배당소득 분리과세도 추진한다. 이상헌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우리나라 기업의 낙후된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자사주 소각만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