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아 카카오벤처스 대표가 카카오(035720)의 차기 단독대표로 내정됐다. 창사 이래 최대 위기에 놓인 카카오가 이미지 쇄신을 위해 택한 카드다. ‘40대 여성’이면서 ‘친(親) 벤처·스타트업’ 행보를 보여온 정 대표를 내세워 혁신을 꾀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번 정 대표의 내정은 여러모로 임지훈 전 카카오 대표의 행보를 떠올리게 한다. 임 전 대표 역시 카카오벤처스(옛 케이큐브벤처스) 대표 출신이며, 나이는 35세로 정 대표보다도 젊었다. 당시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이 임 전 대표를 선임했던 것도 회사의 중요한 변곡점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정 대표를 카카오벤처스에 영입해 성장의 기반을 마련해준 장본인도 바로 임 전 대표다.

정신아 카카오 대표이사 내정자(왼쪽), 임지훈 전 카카오 대표이사(오른쪽). /조선DB

15일 정보기술(IT) 업계에 따르면, 카카오는 13일 오전 이사후보추천위원회를 열고 정 대표를 카카오의 차기 단독 대표이사 내정자로 보고했다. 정 대표는 내년 3월 이사회와 주주총회를 거쳐 카카오의 사령탑을 맡게 될 예정이다.

정 대표가 카카오의 차기 CEO로 내정됐다는 설은 이미 지난달부터 돌았다. 카카오 내부 사정에 정통한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네이버도 40대 여성인 최수연 대표가 이끌고 있듯, 카카오 내부에서도 이미지 쇄신을 위해서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에 걸맞는 젊은 여성 CEO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홍은택 대표가 SM 시세조종 의혹과 관련해 검찰에 송치돼 대표이사 연임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 카카오 입장에선 CA협의체 사업 총괄대표를 맡고 있는 정 대표 외엔 마땅한 대안이 없었을 것”이라며 “인품과 매너가 좋고 리더십이 있어서 카카오벤처스에서 (이번 인사에 대해) 많이 아쉬워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임지훈 전 대표와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벤처캐피털(VC) 출신의 젊은 CEO라는 점뿐 아니라, 카카오가 변곡점을 맞이했을 때 혁신을 위해 선임됐다는 점도 비슷하다.

2015년 다음과 카카오가 합병하고 택시·인터넷 은행 등 모바일 사업을 강화하던 국면에서, 김 의장은 ‘젊은 리더’인 임 전 대표를 발탁해 혁신을 맡겼다. 이후 임 전 대표는 2년 반 동안 카카오를 이끌다가 2018년 1월 용퇴했다. 스스로의 판단으로 사퇴했다는 게 카카오의 공식 입장이지만, 당시 업계 일각에서는 그가 취임 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해 사실상 경질됐다는 분석이 나온 바 있다.

두 전·현직 CEO는 개인적인 인연으로도 얽혀있다. 정 대표는 지난 2000년부터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서 일했으며 임 전 대표는 2006년 BCG에 입사했다. 이후 임 전 대표가 소프트뱅크벤처스를 거쳐 2012년 카카오벤처스의 초대 CEO로 발탁되자, 2년 뒤 정 대표를 이사로 영입했다. BCG 상사를 자기 밑으로 데려온 셈이다. 이후 2018년 임 대표가 카카오의 수장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정 대표가 카카오벤처스 CEO를 맡게 됐다.

임지훈 전 카카오 대표이사/조선DB

정 대표와 임 전 대표의 인연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현재 두 사람은 법정 다툼을 벌이는 관계가 됐다. 임 전 대표가 지난해 3월 카카오벤처스와 정 대표를 상대로 약 600억원의 성과급 반환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임 전 대표는 카카오벤처스에 있었을 때 ‘케이큐브1호 벤처투자조합펀드’를 통해 두나무에 2억원을 투자했는데, 이 지분 가치가 2021년 펀드 청산 시점에 1조7000억원까지 불어났다. 투자 당시 7억원에 불과했던 두나무의 몸값이 20조원으로 폭등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임 전 대표는 2015년 카카오로 옮기며 성과보수에 대한 계약 내용을 수정한 바 있다. 성과보수 우선 귀속분을 60%에서 44%로 낮추되, 직무 수행 기간과 상관없이 전액 지급받을 수 있도록 변경한 것이다. 이에 임 전 대표는 펀드 청산 후 카카오벤처스에 “약속한 성과급 598억원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카카오벤처스는 약정 당시 주총과 이사회 결의를 거치지 않았다며 지급을 보류했다. 반면 정 대표는 260억원의 성과급을 받아 갔다는 게 임 전 대표의 주장이다.

성과급 반환 소송 1심에서는 임 전 대표가 패소했다. 임 전 대표는 결국 최근 항소를 제기하며 2라운드를 예고한 상태다. 항소심 사건은 14일 서울고등법원에 접수됐다.

업계에서는 정 대표가 ‘온화한 성품’을 지녔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나 투자 능력에 있어선 임 전 대표가 더 낫다고 평가한다. 두나무를 비롯해 왓챠, 모바일 게임 업체 넵튠 등 카카오벤처스에 잭팟을 안겨준 상당수 포트폴리오가 임 전 대표의 작품이다.

카카오벤처스는 정 대표 체제에서도 당근, 블라인드 등에 투자하며 성장세를 이어갔다. 다만 암호화폐 업체 테라폼랩스는 ‘아픈 손가락’으로 꼽힌다. 카카오벤처스는 2019년 테라폼랩스 자회사인 특수목적법인(SPC) 플렉시코퍼레이션에 투자하고 그 대가로 루나(LUNA) 코인 상환권을 얻었다. 플렉시코퍼레이션은 권도형(몬테네그로 구금) 전 테라폼랩스 대표의 ‘자금 통로’로 의심받아 검찰에 압수수색을 당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