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조원이 넘는 국민 노후 자금을 굴리는 국민연금이 '지배구조 개선 자문위원회(개선위)' 설치 논의에 나서면서 연금의 기업경영 개입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국민연금은 자금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민간 기업의 지분을 대거 보유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기업의 경영권을 지나치게 간섭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개선위 설치가 마무리되면 KT에 이어 포스코그룹이 국민연금의 다음 목표가 될 것이란 추측도 나오고 있다.

주주총회 거수기 취급을 받던 국민연금은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권 시절 달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주가치를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명분이 있다면서 조금씩 목소리를 냈다. 이후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8년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되면서 국민연금이 기업경영에 개입하는 일이 노골화됐다.

최정우 포스코그룹 회장이 지난 7월 3일 포스코 포항 본사에서 열린 포항제철소 1기 종합준공 50주년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KT에 이어 포스코에도 영향력 행사 우려

개선위 설치로 국민연금의 기업 경영 개입이 더 잦아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개선위가 개선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내용은 ▲소유분산 기업 등의 바람직한 지배구조 방향의 제시 ▲의결권 행사 기준의 적정성 검토 및 합리적 개선 ▲스튜어드십 코드 이행 상황 점검·자문 및 개선이다.

이르면 연내 출범하는 개선위는 기존 수책위와 역할이 유사하다. 하지만 수탁자 책임 활동을 평가하는 기관이어서 수탁위가 독립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게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수책위는 경영계와 노동계 등 외부 전문가 위원들로 구성되지만, 개선위는 공단 이사장이 추천하는 구조다.

특히 개선위가 소유분산 기업에 대한 지배구조 방향 제시를 할 수 있다는 점이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김태현 국민연금 이사장, 서원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 모두 소유분산 기업의 지배구조 문제를 언급하며 구현모 전 KT 대표 연임에 대해 반대 입장을 냈기 때문이다.

이에 다음 목표는 KT와 같이 공기업이었다가 민간 기업이 된 포스코그룹이 되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시점도 딱 맞아떨어진다. 2018년 7월 취임한 최정우 포스코그룹 회장은 2021녀 3월 연임에 성공했고, 임기는 내년 3월까지다. 3연임을 두고 충돌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인 셈이다. 최정우 포스코그룹 회장은 지주사 전환과 재계순위 5위 탈환 등의 성과를 거뒀지만, 임기 완주를 자신할 수는 없는 상황이 됐다. 구현모 전 KT 대표 역시 양호한 경영 성과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의 반대 의견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자진 사퇴했기 때문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2021년 8월 26일 오전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속행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 거수기 벗어나 존재감 커진 국민연금

국민연금이 거수기에서 벗어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 건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부터다. 당시 국민연금은 '2010년도 사업운영계획보고'를 통해 연금이 주요주주로 있는 기업에 대한 의결권 행사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듬해에는 'ESG 원칙'을 도입하며 의결권 행사 기준까지 마련했다.

기준으로는 ▲탄소와 오염물질을 적게 배출하는 회사(환경) ▲사원 복지를 위해 노력하고 지역사회와 교류하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회사(사회) ▲기업경영이 투명한 회사(지배구조) 등을 제시했다. 하지만 공공성을 빌미로 기업들의 목줄을 죄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실제로 당시 곽승준 미래기획위원회 위원장은 대기업에 대한 국민연금의 경영개입을 강하게 주장했다.

다음 정부인 박근혜 정부 역시 국민연금 보유 주식에 대해 100% 의결권을 행사하고, 경영 성과나 지배구조 문제 기업은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특별관리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정부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을 지분을 이용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국민연금이 10% 지분을 보유한 삼성물산 가치가 합병으로 낮아지는데도 불구하고, 삼성그룹 승계를 위해 이를 승인했다는 것이다. 합병 찬성에 압력을 가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공단 본부장은 모두 실형을 선고받았다.

국민연금은 지분 보유 기업에 대한 인사권 행사도 공개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2017년 국민연금은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북부구간을 운영하는 서울고속도로 신임 대표이사 후보로 강태구 씨를 추천했고, 그는 대표로 선임됐다. 당시 국민연금은 서울고속도로 지분을 86% 가진 대주주였다.

고 조양호 한진그룹 전 회장

◇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으로 입김 세진 '집사'

정부의 기업경영 개입은 전임 정부 시절 본격화됐다. 2018년 7월부터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됐기 때문이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고객의 돈을 맡아 운용하는 기관투자가가 '충직한 집사(스튜어드)' 같은 마음으로 따라야 하는 행동 지침을 말한다. 기관투자가가 주식을 투자한 기업의 의사결정에 주주로서 적극적으로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과거에는 투자 기업의 주주총회 안건에 대해 찬반을 결정하는 단순 의결권만 행사했다.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으로 저배당이나 지배구조 취약 기업 등에 대화를 요구하고, 주주제안을 통해 이사를 해임하거나 원하는 이사를 추천하는 등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가 가능해졌다.

국민연금은 2018년 '저배당 기업 블랙리스트'에 남양유업과 현대그린푸드를 처음으로 올렸다. 이듬해엔 한진그룹 지주사 한진칼에 대해 정관변경 주주제안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경영 참여에 나섰다. 2019년 말에는 주주대표 소송을 제기하기 위해 삼성물산과 롯데하이마트 등 20여 개 국내 기업에 비공개 서한을 발송하기도 했다.

또 국민연금은 제도 도입 6개월 뒤인 2019년 고 조양호 전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재선임안에 반대하며 제동을 걸었다. 당시 국민연금은 대한항공 지분 11.56%를 가진 2대주주였다. 국민연금은 당시 조 회장 일가가 2015년 '땅콩 회항', '물컵 갑질', '대학 부정 편입학', '폭행 및 폭언' 등 각종 논란에 휩싸이면서 주가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봤다.

지난해 3월엔 SK 정기 주주총회 안건 중 사내이사 최태원 선임에 대해 반대표를 던지기도 했다. 당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국민연금 반대에도 사내이사에 재선임됐다. 연금은 각각 지난해와 2021년 진행된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물적분할에 대해서도 반대 의사를 표했다. 연금 결정과 달리 물적분할은 단행됐다.

서울 서대문구 국민연금공단 서울북부지역본부 민원실./뉴스1

◇ 주주가치 제고 vs 연금 사회주의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범위가 넓어질 때마다 연금 사회주의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연금 사회주의는 연금 규모가 커지고 보유주식 지분도 늘면서 기업에 대한 정부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말한다. 국민연금이 일관되지 않은 잣대로 주주권을 행사할 경우 주주가치가 되레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감사원도 국민연금의 명확하지 않은 스튜어드십 코드 행사를 지적한 바 있다. 지난 2020년 감사원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지분 보유 기업의 이사 선임 때 기업가치 훼손 이력이 있는 경우에만 반대할 수 있도록 규정을 만들었지만,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당시 감사원이 지적한 사례는 8건이다.

윤승영 한국외대 법학과 교수는 "태생적 한계로 국민연금의 기금운용본부는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어 일관성 논란이 생기는 것"이라며 "국민연금이 각 사안에 대해 면밀한 분석하고 결정 사유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과정이 이뤄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김원식 건국대 명예교수는 "국가 기관인 국민연금이 민간 기업에 주주권을 행사하면 사기업이 국가 기업처럼 돼 자본시장에 큰 부담이 될 것"이라며 "그간 국민연금은 음과 양으로 이런 일들을 많이 해왔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