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자산운용사 간 '타사 상장지수펀드(ETF) 베끼기'가 고질병화될 조짐이 보이자, 한국거래소가 관련 규정 개선에 나섰다. 구체적으로 지수의 우선적 사용권에 대한 규정을 수정하는 방법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지수의 우선적 사용권이란 운용사 등이 지수 사업자와 독창적인 지수를 고안해 ETF를 상장할 경우, 일정 기간 다른 운용사는 해당 지수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선점 효과가 무엇보다 중요한 ETF 시장에서 지수의 우선적 사용권은 독창적인 상품을 만드는 운용사에 유리하게 작용할 전망이다.
3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한국거래소는 올해 안에 ETF와 관련해 지수의 우선적 사용권 제도를 손볼 예정이다. 현재 모호한 우선적 사용권 인정 기준을 명확히 하고, 지수의 배타적 사용 기간의 연장 등을 검토 중이다. 한국거래소는 업계 의견을 취합해 최종안을 결정할 계획이다.
2018년 6월부터 한국거래소는 아이디어 제공 등 지수를 개발할 때 기여도가 있는 운용사에 한해 인센티브를 제공해달라는 업계의 요청을 받고 우선적 사용권을 부여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우선적 사용권 인정 시 고려하는 요소는 기존 상품과 비교한 독창성의 정도와 상품 개발에 투입된 인적·물적 자원의 투입 정도 등이다. 우선적 사용권을 인정받으면 타 운용사는 해당 지수를 활용한 ETF를 최장 6개월까지 낼 수 없다.
실제 사례도 있다. 2020년 한국거래소는 미래에셋자산운용에 KRX BBIG K-뉴딜지수의 배타적 사용 기간 3개월 인정했다. 이는 한국거래소가 뉴딜 관련 수혜가 예상되는 종목을 대상으로 하는 K-뉴딜지수의 개발을 추진하던 중 미래에셋자산운용이 그와 유사한 BBIG(바이오·배터리·인터넷·게임) 지수를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에 한국거래소는 두 지수의 방법론을 통합해 단일 지수로 개발했고, 종목 선정과 지수 산출 과정에서 미래에셋자산운용의 기여도를 인정했다.
2020년까지만 해도 배타적 사용권을 인정받은 증권사와 자산운용사는 10개사 정도였으나, 현재는 제도가 유명무실해진 상태다. 최근 몇 년은 지수의 우선적 사용권을 인정받은 금융투자회사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는 사이 ETF 시장은 순자산 100조원까지 성장했다. 시장이 커지면서 운용사 간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지난달 미래에셋자산운용이 TIGER 미국배당다우존스를 출시하자, 같은 지수로 미래에셋보다 먼저 상품을 낸 한 운용사가 금융투자협회에 항의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투자신탁운용은 2021년 10월에, 신한자산운용은 지난해 11월에 TIGER 미국배당다우존스와 같은 지수를 추종하는 상품을 내놓은 바 있다.
ETF 업계 1위인 삼성자산운용의 상품을 타사가 따라 한 경우도 있다. 삼성자산운용이 지난해 4월 한국무위험지표금리(KOFR)를 기초 지수로 한 ETF를 내놓자 그해 11월 미래에셋자산운용이 KOFR금리액티브를, 올해 3월엔 NH-Amundi와 한화자산운용이 KOFR금리 ETF를 출시한 바 있다.
이번 제도 개선의 배경은 시장에서 반응이 좋은 ETF를 서로 베끼는 등 중복 상품으로 인한 시장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또 혁신적인 상품 출시를 위한 업계의 동기를 자극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ETF는 선점 효과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장이다. 한 자산운용사의 임원이 "ETF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한 번 선점한 시장(테마)은 절대 뺏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라며 "타사에서 특정 상품이 잘될 것 같으면 그 상품이 자리 잡기 전에 빨리 따라 출시해서 판을 깨야 한다"라고 말할 정도다.
이 때문에 타사의 커닝을 일정 기간 방지할 수 있는 개선된 지수 우선 사용권에 대해 운용사의 기대도 크다. 또 다른 자산운용사의 임원은 "그동안 초대형사가 (자금을 모으는) 시딩 능력을 기반으로 타사 상품을 따라 해 운용사들의 불만이 컸다"며 "제도가 개선될 경우 우리 운용사에만 있는 ETF로 일정 기간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자산운용과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양강 구도에 금을 낼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한 관계자는 "테마형에 강점이 있는 운용사는 지수 우선적 사용권이 활성화되면 날개를 달 수 있다"며 "다만 이 전제는 우선적 사용권의 제도 개선이 시장 상황을 잘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