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설립된 A자산운용사가 국내 주식에 투자하기 위해 만든 사모펀드는 설정 이후 수익률이 400%를 기록하고 있지만, 해당 펀드 판매사는 한 곳밖에 없다. 잘 알려진 웬만한 대형 운용사보다 수익률이 좋지만, 펀드를 팔아주겠다는 금융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금은 펀드 규모가 400억원 정도로 커졌지만, 설정 초기에는 투자자를 찾지 못해 친인척의 자금까지 끌어모아야 했다. A 운용사 대표는 "높은 수익률을 증명했지만, 새로운 투자자 자금은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며 "증권사들이 사모펀드 판매를 꺼리고 있어 운용 규모를 키우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라임·옵티머스 사태 이후 은행, 증권 등 금융사들이 사모펀드 판매에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펀드 설정액을 채우지 못하는 중소형 운용사들이 상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국내에 등록된 자산운용사는 426개인데, 이 가운데 대형 운용사 일부를 제외하면 상당수 운용사가 펀드 판매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판매사를 구하지 못한 소규모 사모펀드 운용사는 직접 펀드 판매에 나서는 경우도 있지만 의미 있는 성과를 내진 못하고 있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증권가. /뉴스1

수조원대의 펀드 환매가 중단된 라임·옵티머스 사태 등 부실 사모펀드 사건이 잇따라 터진 이후 은행·증권사·보험사 등 판매사가 판매를 꺼리면서 사모펀드 업계가 고사 위기에 처했다. 통상 투자자들이 대형 운용사 상품을 선호하기 때문에 중소형 운용사는 가뜩이나 투자자를 모집하기 어려운데, 판매사조차 판매를 외면하면서 펀드 설정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판매사가 사모펀드 판매를 꺼리는 이유는 판매에 대한 책임은 큰 데 이에 따른 이익(수수료 수익)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금융 당국이 판매사인 증권사에 투자 원금을 보상하도록 결정한 라임·옵티머스 사태 이후 판매사의 몸 사리기는 더 심해졌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금융사가 사모펀드를 판매할 때 판매사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은 0.5~1% 수준의 수수료 이익인데, 운용상 사고가 발생하면 판매사가 투자금을 물어줘야 하는 덤터기를 쓸 수 있다"며 "기대되는 수익에 비해 책임이 너무 커 다들 사모펀드는 판매하지 않으려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특히 업력이 길지 않은 중소형사의 판매 환경이 좋지 않다. 예를 들어 전체 설정잔액이 3조원을 넘는 대형 운용사 타임폴리오자산운용의 펀드는 삼성증권, KB증권, NH투자증권을 포함해 총 23개 증권사에서 판매되고 있다. 반면, 287억원 규모의 펀드를 운용하는 테라몬스자산운용 펀드는 이베스트투자증권에서만 전량 판매되고 있다.

이 때문에 신생 운용사나 소형 운용사는 증권사를 찾아가 펀드 판매를 요청해도 거부당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펀드 판매가 결정되더라도 지점 직원이 금융 소비자에게 사모펀드 상품을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는 경우도 많다. 펀드를 설계해 운용하는 운용사는 증권사나 은행 등 고객과 대면 채널을 운영하는 곳에 판매를 위탁한다. 판매사는 상품위원회를 열어 펀드의 수익성과 위험성을 다방면으로 검토해 판매를 결정하는데, 위원회를 통과해 판매가 결정돼도 지점 직원이 고객에게 상품을 소개하지 않으면 펀드는 판매되기 어렵다.

중소 운영사가 펀드 판매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은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신규 사모펀드 설정액은 55조원으로, 2019년 설정액(110조원)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업계 관계자는 "증권사들이 사모펀드 판매에 난색을 보이고 있고, 은행들이 수탁을 거부하는 상황이 모두 맞물린 결과"라고 설명했다.

금융투자업계는 판매사에 무거운 책임을 지운 라임·옵티머스 사태가 무서운 선례가 됐다고 입을 모은다. 금융감독원 금융분쟁조정위원회는 라임펀드를 판매했던 대신증권(003540)과 KB증권에 각각 투자 원금의 80%, 60% 손해배상하라고 결정했다. 해당 사모펀드가 부실했던 점을 인지하지 못하고 고객들에게 위험성 고지 등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운용사가 펀드를 설계하지만, 앞으로는 펀드의 위험 등급을 증권사나 은행 등 판매사가 산정하는 방안도 시행된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1월 이런 내용의 '투자성 상품 위험등급 산정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지금까지는 펀드 위험 등급을 해당 상품을 만든 운용사가 정했는데, 앞으로는 위험 등급 산정 주체가 증권사나 은행 등 판매사로 바뀐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에 따라 앞으로 원금 손실 위험이 있는 투자성 상품 위험 등급은 금융소비자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판매사가 고지해야 한다. 해당 가이드라인은 올해 4분기 이후 판매되는 투자성 상품부터 적용될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중소 운용사의 펀드 판매 대란이 해결되려면 사모펀드에 대한 '신뢰 회복'이 우선이라고 지적한다. 한 대형 증권사 프라이빗뱅커(PB)는 "사모펀드의 특성상 50명 이상에게 투자 권유를 할 수 없고, 고객이 먼저 찾지 않는데 무작정 추천할 수 없다"며 "사모펀드가 도덕적으로 잘 운영이 되고, 수익률이 좋아 시장에 입소문이 나면 투자자들이 사모펀드를 찾게 될 것이고, 그런 사례가 증가하면 증권사들도 관련 부서에 의뢰를 하는 등 선순환 구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