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인 주주 환원 요구에 국내 기업이 자사주를 사들이는 규모를 키우고 있지만, 대다수의 경우 소각까지 이어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자사주를 취득하는 데 그치면 기업이 언제든지 다시 시장에 내다 팔 수 있어 주주 환원으로 보기 힘들다. 최근엔 SK하이닉스가 자사주를 담보로 교환사채(EB)를 발행하면서 주주들의 한숨은 깊어지고 있다.
14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들어 유가증권시장 상장 기업이 발표한 자사주 취득 규모는 1조4235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8647억원)보다 64.62% 많았다. 올해 자사주 취득 규모가 급증한 이유는 행동주의 펀드를 중심으로 투자자의 입김이 거세졌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SM엔터테인먼트 저격수로 이름을 알렸던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은 두 번째 캠페인 상대로 국내 상장 금융지주를 지목했다. 주주 환원 정책을 강화해 저평가된 주가를 끌어올려야 한다는 게 골자였다. 이에 맞물려 지난 2월 7일 KB금융은 300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취득해 소각한다고 공시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KB금융은 단 1주의 자사주도 매입하지 않았다.
상황은 기아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4분기 경영실적 컨퍼런스콜에서 기아는 동일 업종과 비교해 주가가 낮은 점을 인식하고 자사주를 매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어 올해 1월 27일 기아는 500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취득할 것이라고 공시했다.
기아는 올해를 포함해 향후 5년 동안 2조500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소각하는 물량은 매입된 주식의 50%다. 나머지 50%는 시장 상황을 보며 결정할 방침이다. 기아 역시 KB금융과 마찬가지로 지난해 같은 기간 자사주 매입을 발표하지 않았다. 기아와 KB금융이 총 8000억원 규모의 자사주 취득 계획을 발표하면서 전년보다 코스피 기업의 자사주 취득 규모가 증가한 것이다.
통상 기업의 자사주 취득은 유통 주식 수가 줄어 주가엔 호재로 작용한다. 하지만 우리 시장에서는 '자사주 취득=주가 상승'의 공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자사주를 사면 소각하는 외국 기업과 달리 우리나라 기업들은 자사주를 샀다가 시장에 그대로 내다 파는 경우가 허다한 이유에서다.
올해 자사주 취득을 발표한 코스피 기업 24곳 중 단 4곳만이 자사주를 소각한다고 밝혔다. 그마저도 기아는 매입한 주식의 절반만 소각한다는 계획이다. 주가의 안정화를 위해 자사주를 매입한다는 기업이 16곳으로 가장 많았으며, 임원 성과 보상 2곳, 이익 소각과 무상수증이 각각 1곳이었다. 소각 외에는 잠재 매도물량(오버행) 부담이 있는 것이다.
최근엔 SK하이닉스가 자사주를 담보로 1조9744억원 규모의 해외 EB를 발행한다고 밝히면서 투자자의 공분을 샀다. 교환사채란 증권으로 교환할 수 있는 권리가 포함된 사채로, SK하이닉스는 이때 교환되는 증권을 자사주로 설정했다. 사실상 자사주를 시장에 내다 판 것이다.
금융당국은 최근 이같은 문제점을 인식하고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의 일환으로 자사주 제도를 전반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주주 환원 정책 효과가 제대로 나려면 (기업에) 소각을 의무화해야 한다"며 "재계의 반발이 거셀 경우엔 신규로 취득한 자사주에 한해 소각을 의무화하는 방안이 절충안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