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은행에서 600억원이 넘는 회삿돈을 빼돌린 사건이 발생하면서 회계 시스템 책임론이 불거졌다. 횡령이 발생한 6년을 포함해 딜로이트안진 회계법인(이하 딜로이트안진)은 우리은행 외부 감사를 16년 동안 맡아왔다. 대우조선해양 분식회계 사태에도 휘말린 이력도 있는 만큼 딜로이트안진의 감사 과정에 구멍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28일 서울 중구 우리은행 본점 앞으로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뉴스1

29일 경찰과 금융업계 등에 따르면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27일 횡령 혐의를 받는 우리은행 기업개선부 직원 A씨를 긴급 체포해 수사 중이다. A씨는 2012년부터 2018년까지 6년간 세 차례에 걸쳐 500억~600억원 규모의 회삿돈을 개인 계좌로 인출한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경법)상 횡령 혐의를 받고 있다.

아직까지 책임 소재를 두고 의견은 분분하다. 일차적으로 우리은행 같은 대형 금융사의 내부통제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것이 문제지만, 수년간 외부감사를 하는 과정에서 횡령 사실을 발견 못한 딜로이트안진이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는 관측이다. 딜로이트안진은 2004년부터 2019년까지 16년 동안 우리은행 감사를 담당했다. 2020년부터 올해까지 3년은 삼일회계법인이 맡고 있다.

외부 감사의 본질은 재무제표에 표기된 금액을 입증하는 데 있다. 횡령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 핵심은 아니지만, 600억원이라는 금액이 실재하는지는 감사인이 파악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감사인이 재무제표상에서 부풀려지거나 사라진 금액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이다.

더욱이 딜로이트안진이 부실 감사로 논란을 빚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8~2016년 대우조선해양 분식회계 사건이다. 딜로이트안진 소속 전·현직 회계사들은 2010~2015년 대우조선해양 감사 과정에서 분식회계 징후를 감지했음에도 묵인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딜로이트안진은 이후 2017년 금융당국으로부터 1년간 신규감사 업무 정지, 과징금 16억원 조치를 받았다. 올해 초에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도 패소해 딜로이트안진은 대우조선이 국민연금에 지급할 515억원 중 221억원을 부담하라는 판결을 받기도 했다.

이 사건은 2018년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 등 신(新)외부감사법이 도입된 이유 중 하나가 됐다.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는 기업이 외부 감사인을 6년 동안 자유롭게 선임하면, 이후 3년은 금융당국으로부터 감사인을 지정 받는 제도다. 기업이 장기간 같은 외부 감사인을 두면 기업과 고객사라는 갑을관계 내지 유착관계가 형성돼 부실 감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 마련됐다.

일각에선 딜로이트안진이 우리은행 감사를 16년 가까이 맡은 것이 이번 사건 발단이 됐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대우조선해양 때처럼 회계 부정을 알고도 묵인하거나 방조하진 않았더라도, 같은 고객사 업무를 반복적으로 실시하면서 감사가 허술해졌을 가능성이 점쳐졌다. 신외감법 도입 전 시기적 특성을 고려하면 횡령 사실을 발견했더라도, 외부에 알리진 못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중구 대우조선해양 서울사무소. /연합뉴스

익명을 요청한 회계업계 관계자는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당시만 해도 일부 기업은 외부 감사인에게 재무제표만 주고 내부 자료는 오픈하지 않았다”며 “감사인도 굳이 고객사와 관계를 해칠 정도로 무리한 감사를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감사 과정에서 횡령 등 부정을 발견하더라도 내부 보고는 해도, 감사의견에 ‘비적정’까지 주는 건 사실상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감사 과정에서 횡령 사실을 발견 못한 부분을 딜로이트안진의 부실 감사로 단정 짓긴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 외부감사의 목적은 횡령 사실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횡령 여부를 집중적으로 조사하는 ‘부정(fraud)감사’라는 별도의 절차가 마련돼 있기도 하다. 감사를 철저히 하더라도 수백억원 수준의 자금 내역을 일일이 확인하기에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내부회계관리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아무리 강력한 외부 감사 시스템을 적용해도 이런 횡령 사건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정도진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회계법인의 부실 감사라고 볼 수 있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며 “지금처럼 감사의 결과만 보고 부실 감사 지적이 나오기도 하지만, 감사 절차가 어땠는지도 함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황근식 한국공인회계사회 감사기준팀 팀장은 “일반 기업과 달리 은행은 워낙 규모가 크고, 거래 내역도 많기 때문에 계좌 잔고를 다 증명할 순 없다”며 “회계법인마다 기준은 조금씩 다르지만 절대적인 액수도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은행의 자본금, 매출, 이익을 고려하면 600억원이 큰 금액은 아니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