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가상자산(가상화폐·코인) 업계는 2개월 앞으로 다가온 금융위원회 신고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국내에서 영업하는 가상자산 거래소는 특정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특금법)에 따라 오는 9월 24일까지 금융위에 사업자로 등록해야만 앞으로도 영업할 수 있다. 신고하면 살고 못 하면 죽는 셈이다.

가상자산 업계에서는 국내 거래소들이 특금법 신고라는 큰 ‘산’을 넘어야 국내에 가상자산 시장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국가에서 ‘라이선스’를 받아 가상자산 시장 불확실성을 줄이면 가상자산 거래소뿐만 아니라 거래소 이용자들도 안정적인 환경에서 거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특금법 신고 기한이 당장 다음 달 중으로 다가오면서 불확실성이 커지자 코인 가격 급락과 더불어 거래소 폐지 우려 등으로 가상자산 시장 규모가 축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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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곤 국민의힘 의원이 4대 가상자산 거래소(업비트·빗썸·코인원·코빗) 자료를 취합했더니 지난 6월 한 달간 4대 거래소에서 빠져나간 금액은 12조7189억원으로, 같은 기간 4대 거래소 입금액인 10조7191억원보다 16%가량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또 국내 1위 거래소인 업비트 신규 가입자 수는 지난 5월 43만명에서 지난 6월 6만4000명으로 확 줄었다. 불과 한 달 만에 85.4%가 감소한 것이다.

국내서 가상자산 인기가 시들해진 건 줄어든 ‘김치 프리미엄’에서도 알 수 있다. 거래량이 크게 줄면서 해외보다 국내 코인 가격이 높은 정도를 나타내는 김치 프리미엄은 현재 없어졌다. 최근 비트코인이 5300만원을 재돌파하며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지만, 오히려 국내보다 해외 거래소의 비트코인 가격이 더 높은 ‘역(易) 김치 프리미엄’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창 비트코인이 상승 랠리를 타던 지난 5월만 해도 김치 프리미엄은 20%에 달했다.

◇ 당장 다음 달 신고인데… ‘은행 실명계좌’ 여전히 암초

12일 가상자산업계에 따르면 특금법 본격 시행을 앞두고 규제가 강화되면서 4대 거래소를 포함해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 사이에서는 불안감이 확산하고 있다. 무엇보다 은행 실명계좌 발급이 거래소들의 암초가 됐다.

특금법에 따르면 가상자산 거래소는 정보보호관리체계(ISMS) 인증을 받고 은행 실명계좌 확인서를 갖춰 금융위에 등록해야 한다. 즉, ISMS 인증을 받더라도 은행 실명계좌를 발급받지 못한 거래소는 문을 닫아야 한다.

현재 ISMS 인증을 받은 거래소 20곳 중 4대 거래소만 은행 실명계좌 발급 제휴가 돼 있다. 이 4대 거래소도 아직 신고에 필요한 ‘은행 실명계좌 확인서’는 발급받지 못한 상태다. 그러나 나머지 16개 거래소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다. 나머지 거래소는 실명확인 계좌 발급 여부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지난달 초까지만 해도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지만, 이달에 접어들면서 가상자산 거래소 업계에서는 중소거래소들의 줄폐업이 기정사실화돼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4대 거래소 다음으로 규모가 큰 코인빗과 고팍스는 합쳐 180만명(중복 포함)이 이용하고 있지만, 이들마저도 실명계좌를 발급해주는 은행을 찾지 못했다. 나머지 중소형 거래소 이용자는 약 50만명(중복 포함)에 달한다.

한 거래소 업계 관계자는 “아직 실명발급 계좌를 내어줄 은행을 찾지 못했으면 (계좌를 발급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며 “금융당국으로부터 책임 추궁을 당할 수 있는 은행들이 중소 거래소들에는 더더욱 쉽게 실명발급을 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CM거래소는 계좌를 이용하던 KB국민은행으로부터 입출금 정지, 예금계약 해지 통보를 받고 6월 들어 거래 지원을 종료했다. 거래소 코인투엑스(coin2x)는 이달 초까지 거래소 시스템 개편을 진행한다고 했지만 앞으로 재개장이 불투명하다. 거래소 케이덱스와 데이빗도 사실상 운영이 멈춘 상태다.

4대 거래소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트래블룰(Travel Rule)’이 실명계좌 발급에 복병이 됐다. 농협은행이 실명계좌가 연계된 거래소인 빗썸과 코인원에 트래블룰 체계를 구축하기 전까지 가상자산 입·출금을 중단해달라고 선제적으로 요구했기 때문이다.

트래블룰은 가상자산 송금 때 송금인과 수취인을 사업자가 모두 파악하도록 한 자금이동규칙을 뜻하는 일종의 규제다. 특금법 시행령에는 이 트래블룰이 포함돼 있다. 가상자산 거래소 등 가상자산 사업자는 내년 3월 25일부터 트래블룰을 적용해야 한다.

(왼쪽부터) 이종구 한국블록체인협회 자율규제위원장, 이석우 두나무 대표, 허백영 빗썸코리아 대표, 오갑수 한국블록체인협회장, 오세진 코빗 대표, 차명훈 코인원 대표, 전중훤 한국블록체인협회 글로벌협력위원장. 이달 기준으로 업비트는 이 MOU에서 빠졌다. /빗썸코리아

당장 거래소 측이 은행 요구를 따라 할 의무는 없지만, 실명계좌 고삐를 쥔 은행 측 요구를 거스를 수 없다는 게 가상자산 거래소 업계의 입장이다. 한 가상자산업계 관계자는 “트래블룰이 구축되지 않았다고 현재 빗썸이나 코인원의 입출금이 중단되지는 않았지만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4대 거래소는 지난 6월 30일 트래블룰에 공동 대응하는 합작법인을 설립하고 솔루션을 본격적으로 도입하려고 했으나 업비트의 이탈로 일정에 차질을 빚고 있다. 업비트는 이달 초 담합으로 비칠 수 있다고 발을 빼며 독자적인 트래블룰 시스템을 구축한다고 했다. 현재 나머지 세 거래소를 중심으로 합작 법인설립에 대해 긴급히 논의하고 있다. 한 거래소 관계자는 “이용자 대다수를 확보한 업비트가 굳이 공동 트래블룰에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 유예 연장 가능성에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거래소

특금법 신고 요건을 두고 복잡한 상황이 얽히자 정치권에서는 야당을 중심으로 가상자산 거래소 신고 유예 등 내용이 담긴 법안을 연달아 발의했다. 신고 요건을 만족하지 못해 거래소들이 줄폐업하게 되면 수천억원에 이르는 투자자들의 자금이 증발해버려 시장 충격이 클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 등 12명은 거래소들의 신고를 6개월 연장하는 내용 등이 담긴 특금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지난 6일 발의했다. 이 법안에는 가상자산 거래소가 은행으로부터 실명확인 입출금 계좌 발급 심사를 공정하게 받을 수 있도록 ‘가상자산거래 전문은행 제도’를 도입하는 내용도 함께 담겼다. 조명희 국민의힘 의원 등 12명도 실명계좌 확보 문제와 피해자 대책 마련 등 충분한 논의를 위해 가상자산 거래소의 신고 유예기간을 올해 12월까지 한시적으로 연장하자는 내용의 특금법 개정안을 지난 4일 발의했다.

금융위 측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금융위는 다음 달 24일이 지난 이후 일정에 대해서 아직 확정 짓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원래대로라면 특금법 신고를 하지 못한 거래소 사업자는 25일 0시가 되자마자 영업 정지가 돼야 하지만, 너무 빠르게 거래소 폐쇄조치를 하면 시장 충격을 비롯해 투자자들의 불만 등이 밀려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다만 금융위와 금감원 수장이 최근 교체됐기 때문에 금융당국 내부에서도 앞으로 어떤 분위기가 이어질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코인원 고객센터에 비트코인 등 가상자산 시세가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특금법 유예기간 연장 움직임이 정치권에서 흘러나오지만 가상자산 거래소는 마냥 이런 상황을 반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특히 4대 가상자산 거래소 입장에서는 40여 일 앞으로 다가온 특금법 신고에 대해 지난봄부터 여러 신고 요건을 분주히 준비했는데 그 과정이 또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청한 한 4대 거래소 관계자는 “특금법 신고 요건을 맞추기가 어렵긴 하지만 가상자산 사업자 라이선스를 당국으로부터 받으면 지금보다는 가상자산 산업의 불확실성도 줄어들고 영업하기가 수월해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라며 “특금법 유예 기간 연장으로 라이선스 발급이 늦어지게 되면 그만큼 또 불확실성을 견뎌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른 4대 거래소 관계자도 “유예 기간이 연장되면 당장 한숨은 돌리겠지만 그렇다고 부담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라며 “유예 기간이 연장되면서 혹시 금융위에서 지금보다 더 까다로운 신고 요건을 신설하기라도 하면 준비 기간과 비용이 더 드는 등 복잡해질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 거래소 상폐 논란도 과제… 갈 길 먼 투자자 보호

특금법 외에도 가상자산 시장이 국내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부실한 알트코인(잡코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앞서 특금법 신고를 앞두고 거래소들이 규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거래소가 자격 미달이라고 판단한 코인을 무더기로 상장폐지(상폐) 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해 투자자 보호 문제가 불거졌다. 상폐 발표가 나면 가격이 폭락하는 일이 대다수다. 거래소들이 상폐를 발표하는 코인은 대부분 국내서 원화로만 거래되는 이른바 ‘김치 코인’이라서 국내 투자자들이 피해를 떠안게 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업비트의 경우에는 지난 6월 기습적으로 코인 25종을 투자 유의종목으로 지정하고 그중 24종에 대한 상폐를 예고했다. 투자자 보호를 이유로 들었다. 이에 불복하는 일부 개발사는 법정 공방에 나섰다. 법원은 업비트가 피카 상장폐지를 결정한 것은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한 적합한 절차에 따른 결정이라고 판단했다. 피카 코인 개발사인 피카프로젝트는 두나무(업비트 운영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사실상 패했다.

재판부는 가상자산 거래소의 공익적 기능 수행과 관련 법령 등에 따른 시장 관리 책임 및 모니터링 의무 등에 주목했다. 또 거래소의 거래지원 유지 여부 판단에 재량을 부여할 정책적인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에 관한 판단이 존중될 필요가 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의 판단에도 불구하고 가상자산 업계와 투자자들은 ‘갈 길이 멀다’는 의견이다. 업비트 주장과 재판부 판단처럼 투자자 보호가 거래소의 자체적인 상폐를 통해서 제대로 이뤄지는 게 맞느냐는 것이다.

가상자산 전문가들은 거래소의 무분별한 잡코인 상장과 명확하지도, 일관되지도 않은 거래소의 코인 상장·상폐 기준을 문제로 지적했다.

홍기훈 홍익대 경영학과 교수는 “상폐를 시킬 만큼 문제 있는 코인이라면 처음부터 왜 상장을 시켰느냐고 거래소를 비판할 수 있다”며 “상장하는 과정이 더 투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 교수는 “어떤 코인을 왜 상장시켰고, 왜 안전한지 거래소가 사전에 검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