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소프트뱅크의 최고경영자인 손정의 회장이 2016년 7월 도쿄에서 기업 실적을 설명하고 있다. 손 회장은 그해 9월 영국 반도체 설계 기업 ARM 인수를 마무리했다. /로이터 연합

영국 반도체 설계 기업(팹리스) ARM이 14일(미국 시각) 미국 나스닥 상장을 무난히 치러내면서, ‘주인’인 일본 투자사 소프트뱅크그룹의 손정의(마사요시 손) 회장이 한숨 돌리게 됐다. 소프트뱅크는 ARM 기업공개(IPO) 전 지분 100%를 갖고 있었다.

손 회장은 중국 알리바바그룹 투자 등이 소위 대박을 터뜨리며 한때 ‘투자의 신’으로 불렸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은 거액의 투자 손실로 굴욕을 맛봤다. 소프트뱅크가 투자한 회사 중 중국 차량 호출 서비스 기업 디디글로벌(디디추싱)이 지난해 뉴욕증권거래소(NYSE)에서 상장 폐지하고, 미국 사무실 공유 기업 위워크가 파산 위기에 처한 게 대표적이다. 소프트뱅크가 최대주주인 쿠팡은 2021년 NYSE 상장 후 공모가 아래서 거래되고 있다. 일각에선 손 회장의 성공 신화는 일부 투자 성공만으로 과대평가된 것일 뿐이란 비아냥도 나온다.

손 회장은 미국 반도체 설계 기업 엔비디아에 ARM을 매각하려던 계획이 지난해 초 최종 무산된 후, 미국 증시 상장으로 방향을 바꿨다. 삼성전자(005930)·애플·인텔 등 주요 고객사를 투자자로 끌어들이며 ARM을 뉴욕 증시에 성공적으로 데뷔시켰다. 흠집 난 명성을 회복하는 계기가 될지 관심이 모인다.

영국 반도체 설계 기업 ARM이 2023년 9월 14일 미국 뉴욕 나스닥에 상장했다. ARM 최고경영자 르네 하스가 나스닥 마켓사이트 밖에서 직원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AFP 연합

◇ ‘운명’이라던 ARM 인수…나스닥 상장에 삼성·애플 등 참여

ARM은 나스닥 거래 첫날 공모가(51달러) 대비 25% 상승한 63.59달러로 마감했다. 종가 기준 시가총액은 650억 달러(약 87조 원)를 기록했다. SK하이닉스(000660) 시총(15일 종가 기준 89조 원)과 비슷한 수준이다.

상장 하루 전인 13일 ARM 공모가는 희망 범위의 상단인 51달러로 정해졌고, 14일 공모가보다 높은 56.10달러로 거래가 시작됐다. 상장 둘째 날인 15일엔 4.47% 하락한 60.75달러로 마감했다. 이틀도 안 돼 기세가 꺾인 것이냐는 반응도 나왔다.

ARM은 반도체 설계도(아키텍처)를 만들어 삼성전자·퀄컴 등 전 세계 반도체 기업에 판매한다. 260여 개 기업이 ARM의 반도체 설계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제품을 만든다. 스마트폰의 두뇌로 불리는 모바일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반도체 시장에서 ARM의 영향력은 독보적이다. 전 세계 99% 이상 스마트폰 AP가 ARM 설계를 기반으로 한다. ARM은 지난해 말 기준, 세계 차량용 반도체 시장에서도 41%, 클라우드 컴퓨팅 반도체 시장에서도 10% 점유율을 갖고 있다. ARM 설계도 없이 새 반도체를 설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수준이다.

손 회장은 2016년 9월 ARM을 320억 달러에 인수하며 런던증권거래소에서 상장 폐지시켰다. 그전까지 수많은 기술 기업에 투자한 이력이 있는데도, 손 회장은 유독 ARM 인수에 애정을 쏟았다. “내 운명”이라고까지 했다. 5년 후 5배 커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ARM의 나스닥 기업공개(IPO)에 핵심 고객사들이 전략적 투자자로 참여했다. 삼성전자·애플·알파벳·엔비디아·AMD·인텔·케이던스·시놉시스·TSMC가 7억3500만달러어치 주식을 매입했다. /ARM

그러나 ARM은 덩치 면에선 손 회장 기대만큼 폭발적으로 성장하진 않았다. ARM 연매출은 2016년 16억9000만 달러에서 2022년 26억8000만 달러로 59% 증가하는 데 그쳤다. 상장일 종가 기준 시총은 7년 전 인수가 대비 두 배 정도 높은 수준에 불과하다.

손 회장은 이번 IPO를 추진하면서는 ARM을 인공지능(AI) 혁명의 핵심 수혜자로 포장했다. ARM이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쌓아 올린 지배력 덕에 ARM의 고객사 상당수가 IPO에 전략적 투자자로 참여했다. 소프트뱅크는 이번 IPO 때 ARM 주식 9550만 주(9.4%)를 매각해 48억7000만 달러를 조달했다. 이 중 삼성전자·애플·알파벳·엔비디아·AMD·인텔·케이던스·시놉시스·TSMC가 7억3500만달러어치 주식을 매입했다. ARM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 이들 기업이 눈치를 봤다는 관측이 나왔다. 특히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 생산(파운드리) 기업인 대만 TSMC는 1억 달러를 투자했다.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과 손정의(오른쪽)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이 2019년 서울 한국가구박물관에 도착해 만찬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

◇ 중국 대표 반란에 엔비디아에 매각 계획 무산…기업공개로 방향 바꿔

IPO 후 소프트뱅크는 ARM 지분 90.6%를 보유한다. 여전히 절대적 지배권을 갖는다.

손 회장이 ARM을 미국 증시에 상장시키기까지 우여곡절도 컸다. 2020년 9월 손 회장과 엔비디아 창업자 젠슨 황은 ARM을 엔비디아에 매각하는 안에 합의했다. 소프트뱅크는 ARM을 엔비디아에 390억 달러에 매각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국·영국·유럽연합·중국 등 각국 규제 당국이 국가 안보 위협 등을 이유로 반대한 끝에, 양측은 지난해 2월 거래를 취소했다. 당시는 전 세계 반도체 부족 사태로 각국이 반도체 관련 이슈에 특히 예민할 때였다. 젠슨 황은 ARM 인수 불발 후에도 “ARM이 다음 10년간 가장 중요한 CPU 설계자가 될 거라 확신한다”고 했다.

ARM의 중국 법인인 ARM차이나의 경영권 분쟁도 매각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중국은 지난해 ARM 연매출의 24.5%를 차지할 정도로 큰 시장이다. 지역별 매출 비중 기준, 중국이 미국(41%) 다음 두 번째로 큰 시장이다. 미국이 중국으로의 반도체 기술 수출을 제한하고 있지만, ARM은 여전히 중국 반도체 기업에 기술을 팔고 있다.

ARM의 중국 자회사는 원래 소프트뱅크와 ARM이 합작해 만들었다. 그러나 현재 영국 ARM 본사가 직접 보유한 ARM차이나 지분은 4.8%에 불과하다. 소프트뱅크는 2018년 사모펀드 운용사 호푸인베스트먼트가 주도한 중국 투자자들에게 중국 자회사 지배 지분(51%)을 매각했다. 이때 중국 법인명이 ARM테크놀로지에서 ARM차이나로 바뀌었다. 현재 ARM차이나가 ARM 본사의 반도체 설계 기술을 중국에서 판매할 독점권을 갖고 있다.

ARM차이나는 2020년부터 2년 넘게 ARM차이나 최고경영자 앨런 우와 본사 간 경영권 다툼으로 시끄러웠다. ARM 본사는 2020년 이해 충돌을 이유로 앨런 우를 내쫓으려 했다. 그러나 앨런 우는 회사를 나가지 않고 버티면서 ARM이 중국 법인 회계 장부도 볼 수 없게 했다. 결국 ARM은 2022년 4월 ARM차이나 이사회를 움직여 앨런 우를 해임했다. 당시 ARM차이나 직원 430여 명이 앨런 우 퇴출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ARM 투자 설명서에 따르면, 현재 호푸인베스트먼트가 ARM차이나 지분 35%를 간접 보유 중이고, 실체가 불명확한 중국 투자자들이 직·간접적으로 17% 지분을 갖고 있다. ARM은 ARM차이나 지분 48%를 보유한 에이스톤의 지분 10%를 통해 중국 법인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손 회장은 ARM차이나의 반란과 잇단 중국 기업 투자 손실로 중국에 학을 뗀 듯하다. 그는 ARM 상장 직전 미국 CNBC와 가진 인터뷰에서 “소프트뱅크는 중국 익스포저(투자 비중)를 아주 크게 줄였다”고 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미국 공유 오피스 기업 위워크(WeWork) 투자를 후회한다고 밝혔다.

◇ 위워크 투자 폭망…잇단 베팅 실패에 매년 수십조 원 손실

ARM 상장은 약 2년 만의 최대 규모 IPO다. 지난해 초 미국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급격히 올리기 시작한 후로, IPO 시장엔 가뭄이 들다시피 했다. 특히 테크 기업이 찬바람을 세게 맞았다.

테크 기업에 주로 투자했던 손 회장도 최근 몇 년간 막대한 투자 손실을 입었다. 고금리와 미·중 갈등 지속으로 상당수 투자자가 테크주에서 발을 빼며 주가가 약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위워크는 손 회장의 경력에서 재앙적 투자로 꼽힌다. 손 회장 스스로 “여러 면에서 판단이 잘못됐다”며 후회를 표했을 정도다. 손 회장은 2016년 위워크 창업자이자 당시 최고경영자였던 애덤 뉴먼을 뉴욕에서 만나 투자를 결정한 후 총 200억 달러에 육박하는 돈을 쏟아부었다. 위워크가 2019년 8월 IPO 신청 후 뉴먼의 부적절한 처신 논란으로 상장을 철회한 후에도 거의 100억 달러를 투입하며 회사를 떠안았다. 당시 위워크는 이미 매년 수십억 달러의 손실을 내고 있었다. 손 회장은 그해 11월 한 행사에서 ‘뉴먼의 여러 옳지 않은 행태에 눈을 감아 버렸다’고 고백했다.

그 후 위워크는 2021년 10월 스팩(기업 인수 목적 회사)과의 합병을 통해 상장했으나, 주가는 폭락했다. 올 들어 주가가 1달러 아래로 떨어져 동전주로 전락했다. 지난달 NYSE는 위워크 상장 폐지 절차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위워크 부상과 몰락을 다룬 애플 TV플러스 드라마의 제목은 ‘우리 폭망했다(WeCrashed)’이다.

소프트뱅크가 베팅했던 기업 상당수가 손실을 안겼다. 소프트뱅크가 지분 20%를 갖고 있던 디디는 중국 정부 압박에 못 이겨 지난해 뉴욕 증시에서 상장 폐지했다. 쿠팡 주가도 공모가에 한참 못 미친다. 소프트뱅크 산하 기술 집중 투자 펀드 비전펀드가 쿠팡 지분 26%를 갖고 있다.

비전펀드는 연간 우리 돈 수십조 원의 투자 손실을 내왔다. 2022 회계연도(2022년 4월~2023년 3월) 마지막 분기인 올해 1~3월까지 5개 분기 연속 투자 손실을 기록한 후, 2023 회계연도 1분기(4~6월)에 6개 분기 만에 처음으로 투자 이익(1598억 엔)을 냈다. 모회사 소프트뱅크 역시 2021 회계연도에 1조7000억 엔 순손실을 낸 데 이어, 2022 회계연도에도 9700억 엔 순손실을 기록했다.

일본 소프트뱅크 손정의(왼쪽) 회장과 중국 알리바바 공동 창업자 마윈이 2019년 12월 6일 도쿄에서 열린 도쿄 포럼 2019에 함께 참석했다. 손정의 회장은 알리바바의 초기 투자자 중 한 명이다. /로이터 연합

◇ 투자 성공작 알리바바 지분 정리…“방어 모드에서 다시 공격 모드로”

손 회장은 초기 투자자로 참여해 가장 성공적인 투자로 평가받던 중국 알리바바 지분은 거의 처분한 상태다. 손 회장은 2000년 알리바바 공동 창업자 마윈을 만난 후 창업 2년차였던 알리바바에 2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알리바바가 2014년 9월 NYSE에서 기업공개를 하기 전, 소프트뱅크는 알리바바 지분 34%를 보유했다. 이후 꾸준히 지분을 매각해 현금화했다. 올해 4월 기준, 소프트뱅크의 알리바바 지분율은 3.8%에 불과했다.

손 회장은 ARM 상장을 앞두고 CNBC와 한 인터뷰에서 “알리바바 지분 대부분은 이미 매각했다”고 밝혔다. 마윈이 2020년 10월 중국 정부를 비판한 후, 시진핑 정권의 마윈 때려잡기로 회사 근간이 흔들린 상황과 무관치 않을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손 회장은 지난해 한 해 멈췄던 투자 활동을 최근 재개했다. 알리바바 등의 지분을 매각해 현금을 장전했다. 손 회장은 6월 주주총회에서 방어 모드에서 공격 모드로 돌아왔다고 선언했다. 올해 4~6월 이미 18억 달러 규모 투자를 집행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