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챗GPT 달리3

한국 주식 투자자들이 미국 증시 동향을 살피느라 밤잠을 설치는 게 하루이틀 얘기는 아니지만, 최근엔 그 정도가 더 심해진 듯하다. 동조화 경향이 강해져 밤새 미국 증시에서 벌어진 일이 오늘 한국 증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노심초사하기 때문이다.

엔비디아 주가 급락으로 전날 국내 지수가 3% 넘게 빠졌던 탓에 어젯밤에도 그랬던 투자자가 많을 것이다. 앞서 3일 인공지능(AI) 반도체 대표주인 엔비디아는 나스닥에서 9.53% 하락 마감하면서 미국 기업 중 역대 최대 시가총액 감소폭(2790억 달러)을 기록했다. 그 여파로 4일 삼성전자(005930)는 장 중 ‘6만전자’로 떨어졌다가 겨우 7만 원에 턱걸이 마감했다. SK하이닉스(000660)는 8% 내리며 15만4800원까지 밀렸다.

외국인과 기관이 등을 돌린 모양새다. 외국인은 9월 들어 4일까지 3거래일간 삼성전자를 8074억 원어치, 기관은 5831억 원어치 순매도했다. 같은 기간 외국인은 SK하이닉스도 3186억 원어치 순매도했고, 기관도 1506억 원어치 순매도했다. 주가가 떨어질 때마다 저점 매수 타이밍으로 보는 개인만 각각 1조3437억 원어치, 4463억 원어치 순매수했다.

밤새 엔비디아가 저가 매수로 반등했을지 촉각을 곤두세운 사람이 많았을 텐데, 또 떨어졌다. 4일 엔비디아 주가는 1.66%(1.79달러) 내린 106.21달러로 마감했다. 최근 엔비디아 주가 하락은 복합적 요인이 작용한 결과다. 미국 정부가 반독점 조사를 본격화했다는 소식도 악재지만, 무엇보다 미국 경기 침체 가능성과 AI 거품 논란이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증권사들은 국내 반도체 업종 눈높이를 낮추고 있다. DB금융투자는 4일 SK하이닉스의 3분기 매출 추정치를 17조7040억 원으로 5% 낮추고 영업이익 전망치도 6조4800억 원으로 8% 내려잡았다. AI 서버 수요 기반 HBM3E 8단 공급 순항에도 비HBM 수요 둔화를 이유로 들었다. 올해 연간 실적 추정치도 내려잡았다. 이를 반영해 목표주가도 6월 제시했던 30만 원에서 26만 원으로 낮췄다.

서승연 DB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높았던 AI 기대감과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 IT 수요 부진으로 SK하이닉스의 단기 주가 반등 동력이 부재한 상황”이라고 했다.

송명섭 iM증권 애널리스트 역시 반도체 종목에 대해 당분간은 지켜보는 전략을 권했다. 송 애널리스트는 경기 둔화, 실적 악화, 부품 재고 증가 등에 따라 빅테크 업체들의 경쟁적인 AI 투자가 내년 둔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반도체 주가와 동행 흐름을 보여온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경기선행지수가 예측의 잣대가 될 수 있다. OECD 경기선행지수는 6월까지 20개월간 상승세가 지속됐고 반도체 주가도 6월까지 강세를 보였다.

송 애널리스트는 “조만간 OECD 경기선행지수가 하락 전환할 가능성이 있으며, 실제 하락이 시작되면 반도체 주가도 하락기에 접어들고 반도체 업황은 6개월 후 둔화되기 시작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경기와 반도체 업황이 둔화하는 최악의 경우 삼성전자 주가는 20%, SK하이닉스 주가는 45% 추가 하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특히 주가가 추세적으로 하락할 경우엔 SK하이닉스 낙폭이 삼성전자 낙폭보다 클 것으로 봤다.

한 자산운용사는 반도체주 하락에 베팅하는 인버스 ETF(상장지수펀드) 출시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KB자산운용이 미국 반도체 회사들의 주가가 떨어지면 수익이 나는 ETF를 조만간 내놓을 예정이다. 엔비디아 주가가 올 들어 120% 넘게 오르는 등 반도체주 주가가 이미 고점을 찍었다는 의구심이 번지는 상황에서 나오는 상품이다. 실제 상장할 경우 국내에서 반도체 업종 하락에 투자하는 첫 ETF가 된다.

KB자산운용은 1년 전인 지난해 9월엔 이차전지 종목 하락에 투자하는 ‘KB RISE 2차전지TOP10인버스(합성)’ ETF를 상장시킨 바 있다. 에코프로비엠(247540), 에코프로(086520), LG에너지솔루션(373220), POSCO홀딩스(005490) 등 이차전지 기업 주가가 하락해야 수익이 나는 ETF다. 국내에서 이차전지 하락에 베팅하는 유일한 ETF다. 당시 에코프로 주가가 120만 원대(종가)까지 오르는 등 이차전지주가 호황이었기 때문에 인버스 ETF 상장을 앞두고 개인 투자자의 비난이 거셌다. 그러나 KB자산운용은 헤지 목적의 상품이라며 꿋꿋이 출시했고 공교롭게도 이후 이차전지 주가는 무너져 내렸다. 현재 이 ETF의 순자산은 867억 원, 수익률은 37%에 달한다.

반도체 인버스 ETF가 이차전지 인버스 ETF만큼의 수익률을 낼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반도체 인버스 ETF가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심기가 편치 않은 투자자가 적지 않을 거라 짐작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