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증권시장 상장에 나선 두산로보틱스가 기관 수요예측 시험대에서 ‘270대 1′ 수준의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로봇 대장주’이자 하반기 기업공개(IPO) 시장 ‘대어’(大魚)로 주목받으며 LG에너지솔루션(373220)의 2000대 1은 아니라도 1000대 1 경쟁률 기록은 거뜬할 것이란 전망이 나왔던 것과 비교해 초라해 보인다.

최근 시행된 허수성 청약 방지 제도가 기관 수요예측에서 그대로 효과를 발휘한 것으로 풀이된다. 제도 시행 후 수요예측에 나선 다른 기업들로는 평균 22조원 수준의 자금이 몰린 데 그쳤다. 그나마 두산로보틱스로 86조원 기관 청약이 몰렸지만, 작년 LG에너지솔루션의 1경원 청약과 비교하면 기대를 밑돈 것이 사실이다.

기업공개(IPO) 일러스트. /일러스트 이은현

◇ 허수성 청약 방지 시행… 수요예측 경쟁률 절반으로 ‘뚝’

20일 조선비즈가 허수성 청약 방지 제도가 시행된 지난 7월 이후 기관 투자자 수요예측을 진행한 두산로보틱스 등 7개 기업(기업인수목적회사 제외)의 수요예측을 분석한 결과 이들은 평균 648대 1 수준 경쟁률을 기록했다. 직전 달인 6월 수요예측 경쟁률 평균인 1145대 1의 절반이었다.

7개 기업의 수요예측에는 평균 22조원 규모의 기관 자금이 들었다. 두산로보틱스의 공모주 수요예측에 86조원이 몰리며 평균이 올라갔지만, 제도 시행 첫 주자로 나선 빅토리콘텐츠로는 6조원도 몰리지 않았다. 두산로보틱스를 뺀 기관 청약금 평균은 11조원으로 집계됐다.

허수성 청약 방지 제도 시행이 수요예측 경쟁률과 청약 규모를 모두 끌어내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제도 시행 시점이 7월 증권신고서 제출부터로 정해지면서 6월 말에만 4개 기업이 증권신고서를 접수했다. 이들만 해도 평균 995대 1 경쟁률을 기록했다. 청약 규모는 평균 24조원이었다.

허수성 청약 방지 제도는 주금납부능력도 없는 기관 투자자가 일단 청약 물량부터 신청하고 보는 관행을 깨기 위해 시행됐다. 금융위원회는 ‘금융투자업규정’을 개정, 상장 주관사가 수요예측 참여 기관의 주금납부능력을 확인하고 공모주를 배정토록 하는 의무를 새로 부과했다.

지난해 LG에너지솔루션의 경우 기관 투자자들은 1경5203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청약했다. 기관 투자자는 청약증거금을 내지 않아도 돼 허수성 주문이 몰린 탓이 컸다. 수요예측에 몰린 묻지마 자금이 공모가를 띄우고, 또 거품을 일으킨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LG에너지솔루션의 기관 투자자 수요예측 당시 순자본금 5억원, 순자산 1억원의 기관 투자자가 9조5000억원 수요를 제출하기도 했다”면서 “1경원으로 불리는 LG에너지솔루션 수요예측 신화는 사실 거품으로 보는 게 맞는다”고 지적했다.

◇ 94조원은 이례적 규모… 공모주 경상 참여액 11조원 수준 관측

업계에선 현시점 기관 투자자들이 공모주에 동원하는 경상(經常) 참여금액은 약 11조원 수준에 그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두산로보틱스로 몰린 기관 투자자들의 수요예측 참여금액 86조원은 해외 기관 투자자가 많이 몰린 이례적인 규모일 뿐, 많아야 16조원 수준이라는 평가다.

그래픽=정서희

기관 투자자 수요예측 경쟁률은 상장을 추진하는 기업이 기관 투자자에게 배정한 주식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느냐를 가름한다. 예컨대 한 기업이 주식 1주당 가치를 1만원으로 평가해 기관 투자자에게 100주를 발행한다고 할 때, 300대 1 경쟁률은 3억원이 몰렸다는 뜻이 된다.

기관 수요 예측 경쟁률 272대 1을 기록한 두산로보틱스로는 약 86조원 자금이 몰렸다. 두산로보틱스가 기관에 배정한 물량의 최대치인 1215만주(공모주식의 75%)를 공모 희망가 상단(2만6000원)에 적용한 규모가 3159억원인데, 86조원 수준 자금이 몰리면서 272대 1의 경쟁률이 나왔다.

착시가 존재한다. 두산로보틱스를 제외한 6개 기업으로의 기관 투자자 공모 참여금액은 평균 11조원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들 6개 기업의 수요예측 경쟁률은 모두 600대 1 이상, 많게는 841대 1도 기록했는데, 이 역시 공모금액 자체가 적은 데 따른 통계 착시로 파악됐다.

실제 허수 청약 방제 제도 아래에서 처음으로 수요예측을 진행한 빅토리콘텐츠의 경우 수요예측 경쟁률 자체는 731대 1로 두산로보틱스보다 높았다. 하지만 기관 투자자들의 청약 규모는 6조원에 못 미쳤다. 밀리의서재는 두산로보틱스 이전 가장 많은 기관 투자자 자금이 몰린 곳이지만 청약 규모는 16조원이었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금리가 워낙 높아 유동성 공급자(LP)를 끌어오기도 힘든 만큼, 기관들이 공모주 투자를 위해 자금을 무리하게 동원하기보다는 여력이 되는대로 (수요예측에) 참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면서 “두산로보틱스는 해외 기관 투자자 참여도 비교적 많았다”고 말했다.

◇ 중소형 자산운용사 위기… ”경 단위 주문 다시는 안 나올 것”

공모주에 투자하며 명맥을 이어가던 중소형 자산운용사들은 위기를 맞았다. 위탁재산으로 기관 투자자 대상 수요예측에 참여하는 운용사들은 허수 청약 방지 제도로 신설된 금융투자업규정에 따라 개별 위탁재산들의 자산총액 합계를 넘어선 주문 자체를 할 수 없게 됐다.

일부 자산운용사는 주금납입능력을 수요예측 전 3개월의 평균 평가액을 기준으로 산정한다는 규정을 이용, 서로 운용 자산을 몰아주는 식으로 물량 확보를 진행하기도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공모주 우선 배정을 위한 고위험고수익투자신탁으로의 전환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국내 자산운용사들의 절반은 공모주에 투자하며 명맥을 이어온 소형 운영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라면서 “이들이 주금납입능력도 없이 수요예측에 나섰던 결과가 작년의 LG에너지솔루션이었다. 이제는 경 단위 주문 규모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