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계부채가 사상 처음 2000조원을 넘어섰다. 가계부채의 가파른 증가는 한국 경제를 위협하는 잠재 요인으로 거론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가계부채 총량은 많지만 여러 대출 규제로 부실화될 가능성이 낮다는 의견이 있다. 반면 금리 인상기에 접어들면 가계 원리금 상환 부담이 커지고, 내수 경제를 위축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우려도 많다.
26일 한국은행 등에 따르면 올해 2분기 말 가계신용 잔액은 2019조8000억원으로 전 분기보다 25조9000억원 늘어났다. 2021년 3분기 이후 4년 9개월 만에 가장 큰 증가 폭이다. 가계대출 중 주택담보대출은 12조2000억원, 신용대출 등 기타 대출은 12조8000억원 증가했다. 한은은 양도소득세 중과 유예 종료 이전에 주택을 매매하려는 수요와 집단대출, 주식 투자 자금 수요가 대출 증가를 이끌었다고 분석했다.
가계신용은 국내 가계부채 규모를 나타내는 포괄적인 지표다. 금융기관에서 빌린 돈과 신용카드 등으로 외상 구매한 돈을 합한 수치다. 전문가들은 차주의 상환 능력, 금융회사의 건전성까지 고려하면 가계부채가 경제 위기로 번질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한국 가계부채는 주택담보대출 비율이 높은데, 수도권 등 규제 지역은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이 40%로 제한되기 때문에 차주(대출을 받는 사람)가 대출을 갚지 못해도 금융기관은 경매 등으로 대출금을 회수할 수 있기 때문에 금융기관 부실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
이혜인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책임연구원은 "한국의 모기지는 가계 소득 측면에서 채무 상환 능력이 개선되고 있고, 주요국 대비 강화된 규제가 시행되고 있어 신용 리스크가 낮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또 고령화가 급격히 진행되는 한국의 인구 구조 상 가계대출은 당분간 증가하다가 하락 반전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김미루 한국개발연구원(KDI) 팀장은 "기대 수명이 정체된 상태에서 고령층 비율이 증가할 경우 경제 전반의 자금 공급 여력은 축소되고, 청년층 인구 감소로 가계의 자금 수요 역시 줄어들 수 있다"며 "수년 내에 가계부채 비율이 정점을 지나 추세적인 하락세로 전환될 것"이라고 했다.
실제 가계부채의 '분모'인 경제 규모까지 고려하면 상황은 과거보다 개선됐다.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한국 가계부채 비율은 2021년 3분기 99.1%에서 지난해 말 88.6%로 떨어졌다. 한국은행 자금순환통계에서도 올해 1분기 가계부채 비율은 85.3%로 전 분기 88.1%보다 2.9%포인트 낮아졌다. 최근 반도체 수출 호조와 물가 상승 등으로 명목 GDP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부채보다 경제 규모가 더 빠르게 불어난 영향이다. 집계 기준에는 차이가 있지만 가계부채 부담이 코로나19 당시 정점에서 내려오고 있다는 방향성은 분명하다.
가계 소득 증가도 가계부채 부실 가능성을 낮추는 요인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가계의 금융 자산은 부채의 2.47배로 사상 최고 수준이다. 가계가 부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금융 자산도 함께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다.
다만 한국의 가계부채가 주요 선진국보다 많고 경제 위협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 금융 당국의 일관된 인식이다. 1분기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1국 중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스위스(125.3%), 호주(112.7%), 캐나다(99.1%), 네덜란드(94.0%), 뉴질랜드(90.1%), 한국 등의 순이다. 미국(68.1%), 일본(61.1%), 프랑스(59.7%) 등에 비하면 높은 수준이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GDP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이 다소 낮아지더라도 아주 위험한 수준에서 조금 덜 위험한 수준으로 바뀌는 정도"라고 했다.
전세자금대출이 가계부채 국제 통계에 집계되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지난 1분기 말 기준 예금 은행의 전세자금대출 잔액은 165조6987억원이다. 전세보증금을 가계부채 통계에 포함할 경우 스위스를 제치고 1위에 올라갈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카먼 라인하트 미국 하버드 케네디스쿨 교수는 한국의 가계부채에 대해 "선진국 평균보다 높은 수준이며 전세 관련 차입을 감안할 경우 공식 가계부채 비율이 약 50% 높아질 수 있다"고 평가했다.
가계부채를 위험하게 보는 가장 큰 이유는 금융사 부실보다는 경제 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GDP 대비 가계부채가 약 80~85%를 넘어서면 부채 증가가 소비와 성장에 미치는 부정적 효과가 커진다. 가계부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벌어들인 소득 가운데 원리금을 갚는 데 쓰는 돈이 많아져 소비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최근 '빚투(빚내서 투자)' 열풍으로 신용대출이 늘었다는 것도 리스크 요인이다. 신용대출 증 기타 대출은 올해 5월 5조3000억원, 6월 3조8000억원 증가했다. 2분기 가파른 주가 상승세에 빚투가 확산하면서 일반 신용대출과 마이너스통장 잔액이 급속하게 늘었다.
신용산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높은 가계부채 수준과 원리금 상환 부담이 내수 회복 여력을 잠식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적정한 수준으로 가계부채 규모를 조정하는 것은 경제 전반의 성장 잠재력 회복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