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내년부터 가상 자산 양도소득에 과세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가운데, 가상 자산 산업을 포괄적으로 규율할 디지털자산기본법은 정부안조차 국회에 제출되지 않았다. 법안이 늦어지면서 사업을 준비 중이던 업체들은 고사 직전이다. 업계에서는 "정부가 산업을 육성할 생각은 안 하고 세금 걷을 생각만 한다"는 불만이 나온다.
25일 업계에 따르면 국회 정무위원회에는 디지털자산 관련 법안 10건이 계류돼 있으나 법안심사소위 실질 심사는 열리지 않았다. 지난해 6월 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디지털자산기본법안 이후 여야 의원 발의안이 쌓였지만, 정부안은 제출 전이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지난달 29일 국회 정무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안은 마련해 놨는데 약간 이견이 있는 부분이 있다. 하반기 원 구성도 됐으니 최대한 신속하게 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금융 당국은 2024년 7월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1단계법) 시행 당시 곧바로 2단계 입법에 착수하겠다고 했으나, 지난해 말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규제 이견으로 올해 초로 미뤄졌다. 올해 7월 정부가 하반기 경제성장전략에 추진 방침을 담으면서 다시 속도가 붙는 듯했지만 이달 임시 국회에서도 실질적인 논의 없이 내달 정기 국회로 넘어갔다.
여당은 9월 통합안 발의를 목표로 하고 있으나, 10월 국정감사와 11~12월 예산 심사 일정을 감안하면 연내 처리를 장담하기 어렵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당장 발목을 잡는 건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 주체와 가상 자산 거래소 대주주 지분 제한이다. 금융 당국은 자금세탁방지 체계를 갖춘 은행 중심 발행을 선호하고 업계는 비은행 사업자의 진입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규제 권한을 금융위원회와 한국은행 중 어디에 둘지도 정리되지 않았다. 가상 자산 거래소 대주주 지분은 15~20% 상한이 거론되는데 업계는 재산권 침해라며 반발하고 있다.
한국 가상 자산 산업이 수년간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해외 거래소는 새로운 상품을 계속 내놓으며 진화하고 있다. 최근 글로벌 자산 운용 업계의 화두는 가상 자산을 예치해 네트워크 운영에 기여하고 보상을 받는 '스테이킹(Staking)'이다. 단순 보유를 넘어 스테이킹 수익까지 활용하는 ETP(상장지수상품)가 등장하면서 기존 ETF(상장지수펀드)의 새로운 경쟁 요소로 부상했다. 온체인에서 발생한 수익을 투자자에게 현금으로 분배하는 구조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가상 자산 운용사 그레이스케일(Grayscale)은 '이더리움 스테이킹 ETF(ETHE)'를 통해 지난 1월 주당 약 120원(0.083178달러)을, 블랙록의 '아이셰어즈 스테이크드 이더리움 트러스트 ETF(ETHB)'도 지난 6월 주당 약 23원(0.015237달러)을 시작으로 7월 0.032059달러, 8월 0.032499달러를 잇따라 분배했다.
한국은 스테이킹과 랜딩(예치) 서비스의 법적 지위조차 없다.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에 이를 규율하는 조항이 없어 사업자들은 제도 밖에서 서비스를 운영해야 한다. 가상 자산 현물 ETF는 자본시장법이 기초 자산을 금융 투자 상품과 내·외국 통화 등으로 한정하고 있어 국내 운용사가 아예 출시할 수 없다. 정부는 지난달 14일 자본시장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으나 편입 자산 선정 기준, 가격 산정, 수탁 인프라 등 정해야 하는 과제가 줄줄이 남아 있다.
제도 미비에 가상 자산 약세장이 겹치면서 국내 가상 자산 시장은 위축되고 있다. 올해 상반기 원화 마켓 5대 거래소 거래 대금은 3665억달러(약 506조원)로 전년 동기 대비 54.6% 줄었고, 지난 5월 거래량은 30개월 만의 최저를 기록했다.
작년 하반기 거래소 영업이익은 3807억원으로 상반기(6178억원)보다 38% 감소했다. 거래소 수익의 약 98%가 거래 수수료에서 나오는 구조여서 거래 감소는 실적 악화로 이어진다.
신사업으로 돌파구를 찾기도 어렵다. 법인 실명 계좌는 금융 당국이 상장 법인과 전문 투자자부터 단계적으로 허용하겠다고 로드맵을 내놓은 지 1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가이드라인이 나오지 않고 있다. 지난 5월 말 예정됐던 가상자산위원회 논의마저 취소됐다.
커스터디·토큰 증권·스테이블코인 결제 등의 서비스를 준비 중이던 기업들은 부담이 커지고 있다. 이 서비스는 기본법에서 업(業) 종류가 확정돼야 인가 신청이 가능하다. 한 업체 관계자는 "법 시행과 동시에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인력을 뽑고 준비 중인데, 시장이 언제 열릴지 모르니 말 그대로 고사 직전"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