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틸 예르스타드(Ketil Gjerstad) 보스턴컨설팅그룹(BCG) 오슬로 오피스 매니징 디렉터 겸 시니어 파트너는 저성장 시대 대기업의 성장 전략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인공지능(AI)이나 미래 모빌리티 등 신사업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는 것만으로는 지속적인 성장을 담보하기 어렵고, 이미 규모가 커진 핵심 사업에서 다시 성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조직 역량을 갖춰야 한다는 의미다.
예르스타드는 이를 기업의 '성장 활력(Vitality·바이탈리티)'이라고 표현했다. 바이탈리티는 현재의 실적이 아니라 혁신을 통해 미래 성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업의 능력을 의미한다. 그는 한국 기업 가운데 LG에너지솔루션(373220)을 주목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BCG가 올해 선정한 글로벌 바이탈리티 리더 25개 기업 중 하나다. 예르스타드는 "전통적으로 바이탈리티를 높이기 어려운 제조업에서도 지속적인 성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다음은 예르스타드와의 일문일답.
―한국의 많은 대기업은 AI, 반도체, 미래 모빌리티 등에 대규모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투자만으로는 지속적인 성장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CEO는 어느 시점에 새로운 사업 투자에서 기업의 성장 엔진 자체를 재창조하는 방향으로 사고를 전환해야 할까.
"지금이 바로 그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BCG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장기적인 성장을 이룬 기업들은 새로운 성장 분야에 대한 투자만으로 성과를 만든 것이 아니라, 기존 핵심 사업을 지속적으로 재창조하는 데 집중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기업이 바이탈리티를 구성하는 15개 핵심 지표에서 현재 어느 수준에 있는지 객관적으로 진단하는 것이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한국 기업들을 보면 아시아태평양(APAC) 평균과 비교해 연구개발(R&D) 모멘텀은 다소 낮은 편이다. 이는 핵심 혁신 조직에 대한 투자를 더욱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또한 린 경영(lean management·낭비 요소를 최소화하는 경영) 측면에서도 개선 여지가 있어, 과도한 관리 단계로 인해 혁신의 실행 속도가 늦어질 가능성이 있다."
―최근 한국에서는 상법 개정을 계기로 기업가치와 주주환원에 대한 요구가 더욱 커지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CEO는 단기적인 주주 기대와 장기적인 성장 투자의 균형을 어떻게 맞춰야 한다고 보나.
"이는 모든 CEO가 직면하는 가장 어려운 과제 중 하나다. 바이탈리티가 높은 기업들은 공통적으로 명확한 성장 비전과 목표를 시장과 투자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설명하고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특징이 있다. 투자자들이 기업의 성장 전략을 충분히 이해하고 신뢰할 때 장기적인 투자도 지지를 받을 수 있다.
한국 기업들은 이 성장에 대한 명확한 비전과 목표(Growth Ambition) 지표에서 글로벌 평균뿐 아니라 APAC 평균보다도 다소 낮게 나타났다. 이는 경영진이 장기 성장 전략을 보다 명확하게 제시하고 시장과 적극적으로 소통할 여지가 있다는 의미다. 반면 한국 기업들은 디지털·AI 역량과 혁신 인재 확보 측면에서는 APAC 평균을 앞서고 있다. 앞으로의 과제는 신뢰할 수 있는 성장 비전을 명확히 제시해 투자자와 경영진의 이해와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많은 기업이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데 많은 자원을 투입하지만, 기존 핵심 사업을 지속적으로 재창조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는다. 성공적으로 핵심 사업을 혁신하는 기업은 무엇이 다른가.
"가장 큰 차이는 명확한 오너십과 집중이다. 성공적인 기업에서는 CEO나 최고전략책임자(CSO), 최고재무책임자(CFO) 등 최고경영진 가운데 한 명이 성장 아젠다를 총괄한다. 모든 영역을 동시에 바꾸기보다 경쟁사 대비 가장 부족한 2~3개 영역에 집중한다. 예를 들어 로레알은 연구개발과 디지털 혁신에 집중 투자하면서 업계 내 바이탈리티 순위를 26%포인트 끌어 올렸다."
―성장이 둔화하면 경기나 산업 환경 등 외부 요인을 원인으로 돌리기 쉽다. 실제 기업 내부에서 성장을 막는 가장 흔한 장애물은 무엇인가.
"성장이 멈춘 기업을 보면 공통적으로 바이탈리티가 낮다. 원인은 여러 가지다. 성장 목표가 명확하지 않을 수도 있고 R&D 모멘텀이 떨어질 수도 있다. 혁신 조직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지 못하거나 관리 조직이 비대해져 의사결정 속도가 느려지는 경우도 있다.
특히 강력한 신호 가운데 하나가 '인재 이동성(Talent Mobility)'이다. 직원들이 조직 내에서 새로운 역할을 맡거나 승진을 통해 성장할 기회가 적은 기업일수록 바이탈리티가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한국 기업들은 이 지표에서 APAC 평균 수준이다. 그런데 APAC 전체는 글로벌 평균보다 낮다. 따라서 한국 기업들이 내부 인재 이동성을 높인다면 지역 평균을 넘어서는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기업의 CEO는 조직을 관리하는 방식에서도 차이가 있나.
"재무 성과가 악화되고 나서 대응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R&D 모멘텀이나 혁신 인력의 유지 기간, 조직의 관료화 수준 같은 선행 지표를 지속적으로 점검한다. 이런 조직 내부의 변화는 실제 재무 성과로 나타나기까지 2~3년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 그때는 이미 방향을 되돌리기가 훨씬 어렵다."
―CEO가 혁신을 강조해도 시간이 지나면 또 하나의 일회성 프로젝트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혁신을 기업의 운영 방식으로 정착시키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성장 목표와 혁신 인재, 성장 중심 문화가 각각 별개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의 운영 체계로 연결돼야 한다. 그래야 혁신이 일회성 프로젝트에 그치지 않고 실제 사업 성과로 연결된다."
―한국 기업은 강한 실행력과 제조 경쟁력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앞으로 한국 CEO가 가장 먼저 바꿔야 할 것은 무엇인가.
"바이탈리티가 높은 기업일수록 기술 변화와 지정학적 변화에도 더 강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CEO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조직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성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바이탈리티를 구축하는 것이다.
한국 기업들은 이미 조직 전반의 AI 활용과 엔지니어들의 디지털·AI 역량에서 APAC 평균보다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이제는 이러한 기술적 강점 위에 명확한 성장 목표와 자본 배분, 적합한 인재와 조직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좋은 사례가 LG에너지솔루션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올해 BCG가 선정한 글로벌 바이탈리티 리더 25개 기업 가운데 하나로 선정됐다. 전통적으로 바이탈리티를 높이기 어려운 제조업에서도 지속적인 성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앞으로 5년간 한국 기업이 글로벌 성장 리더로 남기 위해 가장 중요한 역량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과제는 세 가지다. 첫째는 성장 전략을 자본시장에 신뢰성 있게 전달하는 능력이다. 이를 통해 자본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한국 기업은 이 부분에서 APAC 평균보다도 낮게 나타났다.
둘째는 혁신 인재가 조직 내부에서 여러 사업을 경험하면서 성장할 수 있도록 인재 이동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APAC 기업이 공통적으로 보완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셋째는 AI 활용과 디지털 역량을 계속 강화하는 것이다. 한국은 이미 APAC 평균보다 앞서고 글로벌 평균에도 근접해 있기 때문에 이 강점을 더 확대할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 기업의 강점이 AI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혁신 관련 직무의 비중이나 고성장 기업 출신 인재를 적극적으로 영입하는 수준도 글로벌 평균을 웃돈다. AI 경쟁력은 이미 많은 주목을 받고 있지만 혁신 인재 측면의 강점은 상대적으로 저평가돼 있다. 앞으로 한국 기업은 이런 인재 경쟁력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