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과 불확실성이 장기화하면서 국내 기업들의 신성장 동력 찾기가 한창이다. 인공지능(AI·Artificial Intelligence)과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미래 모빌리티 등에 대규모 투자가 이어지고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편하려는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동시에 자본 효율성과 투자 수익률에 대한 시장의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새로운 영역에 베팅하는 것만큼 기존 핵심 사업에서 다시 성장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중요해지고 있다.
그러나 기업 규모가 커지고 기존 사업이 성숙할수록 최고경영자(CEO)에게 더 어려운 질문이 남는다. '이미 규모가 커진 핵심 사업을 어떻게 다시 성장시킬 것인가'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최근 3500개 이상의 글로벌 기업을 분석한 '바이탈리티(Vitality)의 힘 : 대기업 CEO들은 어떻게 성장을 재창조하는가(The Power of Vitality: How CEOs Reinvent Growth in Large Public Companies)' 보고서에서 해답을 '성장 활력(바이탈리티)'에서 찾았다. 바이탈리티는 현재 실적이 아니라 혁신을 통해 미래 성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업의 역량을 뜻한다.
◇ 성장하는 대기업은 무엇이 다른가
BCG 분석에 따르면, 시가총액 250억달러 이상 대기업 가운데 바이탈리티 최상위 25% 기업은 2020년 이후 5년간 연평균 11.5%의 매출 성장률을 기록했다. 대기업 전체 평균 6.6%를 크게 웃돈다.
바이탈리티 최하위 25% 기업보다 연간 총주주수익률(TSR)도 3.1%포인트(p) 높았다. 특히 낮은 수준에서 출발해 5년간 바이탈리티를 크게 개선한 기업은 나머지 기업보다 연간 TSR이 6.8%p 높았다.
바이탈리티가 높은 기업에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높은 성장 목표(High Growth Ambition), 높은 인재 밀도(High Talent Density), 성장 중심 문화(Growth-Centric Culture)다. 이 세 요소는 서로를 강화한다. 높은 성장 목표가 우수한 인재를 끌어들이고, 이들이 혁신을 만들어내면 다시 더 높은 성장과 목표로 이어지는 '성장 플라이휠(선순환)'이 만들어진다.
◇ 혁신은 핵심 사업에서 시작해야
BCG는 바이탈리티가 타고난 기업 특성이 아니라 측정하고 개선할 수 있는 경영 역량이라고 본다. 이를 토대로 바이탈리티가 높은 기업을 분석해 CEO가 취해야 할 다섯 가지 행동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혁신의 무대를 기업의 주변부에서 핵심 사업으로 옮겨야 한다. 디지털 랩이나 사내 벤처 등 별도 조직에 혁신을 맡기는 데 그치지 않고 각 사업부가 새로운 성장 기회를 만들도록 해야 한다.
둘째, 미래 성장 역량도 핵심 경영지표(KPI)처럼 관리해야 한다. 매출이나 영업이익이 악화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연구개발(R&D) 모멘텀, 혁신 인재, 조직 구조 등 미래 성장을 보여주는 선행지표를 지속적으로 점검하는 방식이다.
셋째, 성장에도 명확한 오너가 필요하다. CEO나 최고재무책임자(CFO), 최고전략책임자(CSO) 등 최고 경영진 가운데 책임자를 정해 성장 전략과 투자, 조직 역량을 함께 관리해야 한다.
넷째, 가장 중요한 성장 과제에 집중해야 한다. 모든 것을 동시에 바꾸기보다 경쟁사 대비 가장 취약하면서 미래 성장을 제약하는 영역을 찾아 자본과 리더십의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다.
다섯째, 바이탈리티를 일회성 프로젝트가 아닌 기업 운영 방식으로 내재화해야 한다. 성장 목표와 인재, 조직 문화가 서로 연결돼 작동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 한국 기업, AI 다음은 '성장 엔진 재설계'
한국 기업에도 시사점이 있다. BCG 분석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은 AI·디지털 역량과 혁신 인재에서 강점을 보이는 반면, 이를 지속적인 성장으로 연결하기 위한 조직과 경영 체계에는 개선 여지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한국 재계에서도 AI와 소프트웨어 등을 활용해 기존 핵심 사업을 다음 성장 단계에 맞게 재편하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지속적인 성장은 얼마나 많은 신사업을 시작했느냐보다 핵심 사업을 얼마나 끊임없이 재창조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저성장 시대 CEO의 역할도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 데서 나아가 기업이 스스로 다음 성장을 만들어낼 '성장 엔진'을 설계하고 관리하는 것으로 확장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