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년간 한국 재계의 인공지능(AI·Artificial Intelligence) 화두는 단연 '투자'였다. 엔비디아를 중심으로 한 AI 반도체 경쟁부터 AI 데이터센터 구축, 생성형 AI 서비스 출시, AI 에이전트 도입까지 주요 기업들은 앞다퉈 AI 투자 계획을 내놓았다.

삼성전자(005930)SK하이닉스(000660), SK텔레콤(017670), NAVER(035420), 금융권까지 AI를 미래 성장 전략의 핵심 축으로 내세우며 투자 경쟁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러나 시장의 관심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이제 투자자들이 묻는 것은 "얼마를 투자했는가"가 아니라 "언제 돈을 벌 수 있는가"다. AI 투자 규모보다 투자 성과와 수익화 시점, 기업가치로 이어질 수 있는지가 새로운 평가 기준이 되고 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가장 크게 달라질 역할로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지목한다. AI 시대 CFO는 더 이상 재무 성과를 관리하는 역할에 머무르지 않는다. AI 투자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투자 성과를 검증하며, AI가 실제 기업가치로 연결되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AI 가치의 설계자(Architect of AI Value)'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일러스트=챗GPT

◇ AI 시대 CFO의 역할은 왜 달라지는가

전통적으로 CFO는 통제와 보고, 예산 관리가 핵심 역할이었다. 재무 건전성을 유지하고 시장과 투자자에게 신뢰할 수 있는 실적을 제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하지만 AI 시대에는 역할이 달라진다. AI 투자가 급증하면서 어떤 프로젝트에 투자할 것인지, 어떤 사업이 실제 가치를 만들고 있는지, 어디에서 투자를 중단해야 하는지를 CFO가 판단해야 한다.

이는 AI가 기술 프로젝트가 아니라 자본 배분의 문제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AI는 이제 IT 부서의 예산이 아니라 기업 전체의 투자 전략과 직결된다. CFO는 AI 투자 포트폴리오를 관리하고, AI가 기업의 성장과 수익성, 밸류에이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 숫자를 만드는 사람에서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으로

BCG는 'AI 우선 재무 조직(AI-first Finance)'의 가장 큰 변화로 재무 조직의 역할 자체가 바뀐다는 점을 꼽는다. 기존 재무 조직은 대부분의 시간을 수치를 집계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사용했다. 하지만 AI가 반복적인 재무 업무를 자동화하면 CFO와 재무 조직은 숫자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숫자가 의미하는 미래를 해석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

AI는 실시간 예측과 시나리오 분석, 조기 경보를 가능하게 한다. 이를 통해 CFO는 분기 실적이 발표된 뒤 결과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실적이 나오기 전에 위험 요인을 파악하고 대응 방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BCG는 이를 '예상치 못한 일이 없는 재무 기능(No Surprises Finance)'이라고 설명한다. 핵심은 실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실적을 예측하는 것이다. AI를 통해 영업 활동과 가격 정책, 고객 행동, 비용 구조 등 운영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하면 재무 조직은 성과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미리 파악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CFO가 기업의 실시간 재무 헤드업 디스플레이(Heads-up Display·HUD)를 구축해야 한다. AI가 제공하는 예측 정보를 기반으로 CEO와 이사회가 더 빠르게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 AI 시대 CEO가 CFO에게 부여해야 할 세 가지 과제

BCG는 최고경영자(CEO)가 AI 시대 CFO에게 세 가지 새로운 역할을 부여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첫째는 AI 가치 창출 시나리오를 설계하는 것이다. AI가 향후 5년 동안 어디에서 기업가치를 만들 수 있는지 제시해야 한다. 둘째는 AI 투자 포트폴리오를 관리하는 것이다. AI 투자를 하나의 자산 포트폴리오처럼 관리하며, 자본이 가장 큰 가치를 만들 수 있는 영역에 배분해야 한다.

셋째는 실시간 재무 지휘센터를 구축하는 것이다. AI를 활용해 위험과 기회를 조기에 포착하고, 경영진이 보다 빠르게 대응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현재 많은 기업은 여전히 AI 투자에 대한 시장의 기대 속에서 '기다려주는 시간'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이런 기간은 길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투자자들은 곧 AI에 얼마를 투자했는지가 아니라, 그 투자가 얼마나 많은 이익과 현금 흐름, 기업가치를 만들어냈는지를 평가하기 시작할 것이다.

최근 국내 기업들도 AI 데이터센터 구축과 그래픽 처리 장치(Graphics Processing Unit·GPU) 확보, AI 조직 확대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시장은 이미 다음 질문을 던지고 있다. AI가 언제 실적에 반영될 것인지, 그리고 AI가 기업의 밸류에이션을 얼마나 높일 수 있는지다. 특히 금융과 통신, 플랫폼, 제조업에서는 AI 투자 자체보다 AI가 실제 경영 성과를 얼마나 개선했는지가 새로운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AI 시대 CFO의 역할은 더 이상 재무를 관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CEO보다 먼저 AI가 어디에서 가치를 만들고 있고, 어디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으며,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를 읽어내는 사람으로 진화하고 있다. 결국 AI 시대 기업의 경쟁력은 얼마나 많이 투자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빠르게 AI를 기업가치로 연결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