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내 주요 기업의 이사회 안건에서 인공지능(AI·Artificial Intelligence) 비율이 늘고 있다. 삼성전자(005930), SK하이닉스(000660), 현대차(005380)를 비롯한 주요 기업은 생성형 AI(기존 데이터를 활용해 이미지·코드 등 새 콘텐츠를 만드는 AI 기술) 투자와 조직 전환을 미래 성장 전략의 핵심 축으로 내세우고 있다. AI는 더 이상 기술 부서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기업 가치와 경쟁력을 좌우하는 경영 의제가 됐다.
최근 흐름은 더 빨라졌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방한 이후 국내 주요 그룹과 글로벌 AI 기업 간 협력 논의가 부각됐고, SK텔레콤(017670)은 엔비디아와 손잡고 AI 팩토리 기반의 '풀스택 AI 클라우드' 사업에 진출한다고 밝혔다. AI 인프라 투자가 본격화하면서 기업들은 투자 속도와 성과 입증이라는 두 가지 압박을 동시에 받게 됐다. 투자 열기만큼 부담도 커지고 있다.
AI 투자 발표, 데이터센터 구축, 생성형 AI 서비스 출시가 이어질수록 시장 기대는 높아진다. 그러나 실제 수익화 시점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재계에서는 "AI를 하지 않는 것도 리스크(위험 요인)지만, 잘못 투자하는 것도 리스크"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 AI 도입 속도 놓고 엇갈린 CEO와 이사회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발표한 'AI엔 한목소리 내는 CEO·이사회, 실행 단계에선 온도차(CEOs and Boards Are Aligned on AI in Theory, but Divided in Practice)' 보고서를 보면 이 같은 현실을 보여준다. CEO와 이사회는 AI의 중요성에는 동의하면서도 실행 방식과 속도, 책임 구조에서는 상당한 시각차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장 큰 차이는 AI 도입 속도에서 나타났다. 조사에 따르면 CEO의 약 60%는 이사회가 AI 전환을 지나치게 서두르고 있다고 느끼는 반면, 이사회는 기업이 충분한 속도를 내지 못한다고 봤다.
BCG는 이를 'AI 포모(FOMO·Fear of Missing Out·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에 대한 불안)' 현상으로 설명한다. AI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수록 뒤처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커지고, 이는 더 공격적인 투자 압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AI 이해도에서도 온도 차가 나타났다. 이사회 구성원의 75%는 자신의 AI 이해도가 동료 이사들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CEO의 40%는 이사회가 AI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영역을 과대평가하거나, AI가 성장 전략에 미칠 영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 AI 전략은 경영진 몫이지만, 실행 부담은 CEO에게
문제는 책임 구조다. CEO와 이사회 모두 AI 전략은 경영진이 주도해야 한다고 답했지만, 실제 실행 과정에서는 CEO에게 부담이 집중되고 있었다.
조사에서 CEO의 47%는 자신이 AI 전략 실행을 직접 이끌고 있다고 응답했다. 반면 최고 AI 책임자(CAIO)가 AI 전략을 주도해야 한다고 답한 비율은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AI는 조직 구조와 자본 배분, 인력 운영, 사업 모델 전환을 동시에 건드리는 경영 과제다. 국내 기업도 AI 조직을 신설하거나 CEO 직속 조직으로 재편하는 사례가 늘고 있지만, 최종 의사 결정의 부담은 여전히 최고경영자에게 집중되는 경우가 많다.
AI 투자 성과에 대한 인식 차이도 눈에 띈다. CEO들은 자신의 성과 평가 중 평균 35%가 AI 투자 성과와 연결돼 있다고 인식한 반면, 이사회는 그 비율을 27% 수준으로 평가했다. CEO들이 느끼는 AI 성과 압박이 이사회의 인식보다 훨씬 크다는 얘기다.
최근 국내 기업들 역시 AI 투자 발표와 데이터센터 구축, 생성형 AI 서비스 출시 이후 시장의 기대가 높아지는 상황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수익화 시점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결국 CEO 입장에서는 "AI를 하지 않는 리스크"와 "성과 없이 과도하게 투자하는 리스크"를 동시에 관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는 셈이다.
BCG는 AI 전환의 리스크가 기술 자체보다 CEO와 이사회 간 인식 차이에서 커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AI 도입 속도와 투자 수익률(ROI·Return on Investment) 기대, 책임 구조에 대한 시각 차이가 커질수록 AI 전략은 혁신의 동력이 아니라 조직 내 갈등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장도 이제 AI 투자 규모보다 누가 책임지고, 언제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묻기 시작했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어떤 기술을 도입했느냐보다, 그 기술을 어디에 쓰고 어떻게 수익으로 연결할지 결정하는 구조에서 갈릴 가능성이 높다. CEO에게 필요한 것은 AI에 대한 선언이 아니라, 투자와 실행, 성과를 한꺼번에 관리하는 의사결정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