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한 공장에서 일하는 A씨는 부동산 경매 투자를 함께 하자는 직장 동료 조모씨의 제안을 받고 신분증과 원천징수영수증을 넘겼다. 조씨는 A씨 명의로 경매 물건을 낙찰받아 수익을 나누겠다고 했다. 하지만 조씨는 A씨 이름으로 은행에서 전세대출 2억800만원을 받아 가로챘다. A씨를 대신할 역할 대행자를 고용해 은행 창구에서 대출을 받은 것이다. A씨는 "본인 확인에 협조하지 않았는데 공공기관과 은행이 뚫린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16일 금융권에 따르면, 사기·사문서 위조 등 9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조씨의 항소심 선고 공판이 17일 대전고법에서 열릴 예정이다. 조씨는 1심에서 징역 17년을 선고받았다. 조씨 지시에 따라 피해자를 사칭하는 역할 대행을 한 혐의로 함께 기소된 권모씨와 김모씨에게는 징역 6년과 4년이 선고됐다. 조씨는 총 128억원 규모의 대출·투자 사기를 벌였다.

서울의 한 시중은행 대출창구 모습. /뉴스1

청주의 한 공장에서 2000년부터 근무한 조씨는 2020년쯤부터 직장 동료들에게 "부동산 경매로 돈을 벌게 해주겠다"며 명의를 빌려달라고 제안했다. 경매 낙찰 가능성을 높이려면 다수 명의로 경매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경매를 잘 모르는 동료들은 조씨 말만 믿고 신분증과 재직증명서 등을 넘겼다.

조씨는 신분증으로 피해자 명의 휴대전화를 개통했다. 이후 비대면으로 주민등록등본 등을 발급받고, 피해자 이름으로 부동산 임대차 계약서를 허위로 작성했다. 은행에 직접 방문해 계약서를 제출하고 피해자인 척 연기하며 전세대출을 받아 가로챘다. 마지막에는 행정복지센터에서 직접 전입신고까지 했다.

신분증을 넘겨준 실수 하나로 휴대전화 개통, 주민등록등본 등 각종 서류 발급, 허위 부동산 임대차 계약, 금융기관 대출, 전입신고까지 차례로 뚫린 것이다.

일러스트=손민균

조씨는 허위로 각종 계약을 체결하면서 역할 대행 업체를 이용했다. 직장 동료와 성별이 같고 나이가 비슷한 사람을 고용해 대출을 받도록 한 것이다. 부동산 임대차 계약 때는 부동산을 소유한 피해자를 임대인으로, 또 다른 피해자를 임차인으로 명시하고 실제 계약은 역할 대행이 체결했다.

조씨는 피해자 명의로 비대면 신용 대출을 받고, 발급받은 신용카드를 생활비 등으로 사용했다. 조씨가 투자를 권유해 가로챈 투자금까지 포함하면 피해 금액은 218억원에 달한다. 피해자는 40여 명으로 추정됐다.

금융권은 본인 확인 절차 대부분이 휴대전화로 이뤄지는 만큼, 휴대전화가 도용된 이상 허위를 판별하기 어렵다고 했다. 한 은행 관계자는 "도용된 휴대전화로 서명을 대신할 인증서를 발급받았다면 모든 것이 뚫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