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국제 환치기 범죄조직으로부터 압수한 현금. 기사와 직접적 관련 없음. /뉴스1

보이스피싱 조직에서 자금 세탁책 역할을 했던 A씨는 지난 1월 보이스피싱 범죄로 가로챈 1억8800만원으로 이더리움을 매수한 뒤, 이를 해외 가상자산 거래소로 옮겼다. A씨는 이 거래소에서 이더리움을 다시 스테이블코인 테더(USDT)로 교환해 조직이 지정한 가상자산 지갑으로 전송했다. 범죄 수익금이 국내 대포통장→이더리움→해외 가상자산 거래소→스테이블코인→가상자산 지갑 순서로 세탁된 것이다. A씨는 지난 8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보이스피싱, 로맨스 스캠, 중고나라 사기, 주식·코인 리딩방 사기 등 금융 사기 조직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범죄 수익금을 깨끗하게 세탁한 뒤 현금으로 인출할 수 있는지다. 전통적인 수법은 대포 통장을 활용하는 것이다. 피해자를 속여 최초로 돈을 입금받는 대포 통장을 '앞장'(맨 앞에 있는 통장)이라 부르는데, 앞장에 입금된 범죄 수익금을 이곳저곳으로 이체해 추적을 어렵게 한다. 이후 '막장'(마지막 통장)이라 불리는 대포 통장에서 현금을 인출한다.

최근 범죄 조직들은 이런 자금 세탁 수법에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고 있다. 범죄 수익금을 이리저리 돌리다 최종적으로 스테이블코인으로 교환한 뒤 가상자산 지갑을 통해 국내외에서 현금화하는 것이다. 스테이블코인은 해외로 손쉽게 옮길 수 있는 데다 신분 확인이 필요하지 않은 비공식적 거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스테이블코인이 금융 사기 범죄 조직의 '막장' 역할을 하는 셈이다.

9일 가상자산 분석업체이자 국내 수사기관에 가상자산 추적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는 체이널리시스가 최근 낸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불법 가상자산 거래량의 63%는 스테이블코인이었다. 2021년까지만 해도 비트코인이 자금 세탁 등 각종 범죄에 활용됐는데, 최근 스테이블코인이 성장하면서 범죄에 활용하는 사례도 덩달아 많아졌다는 것이다.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는 지난 6월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2024년 이후 불법 행위자의 스테이블코인 사용이 증가했다"며 "대부분의 블록체인 관련 불법 행위는 스테이블코인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유엔 마약범죄사무소(UNODC)도 지난 1월 동남아시아 범죄 단체들에 '가장 인기 있는 자금'이 스테이블코인인 테더라고 했다.

스테이블코인이 범죄 자금 세탁에 사용되는 가장 큰 이유는 범용성 때문이다. 법정 화폐 형태의 범죄자금은 해외로 빼돌리기 어렵고 국내에서 현금화하는 것도 쉽지 않다. 반면 스테이블코인으로 바꾸면 손쉽게 해외로 전송할 수 있다. 현금화 과정에서 신원 확인(KYC)을 하지 않는 해외 가상자산 거래소를 이용하거나, 거래소를 거치지 않고 개인 간의 사적 거래(OTC)를 통해 현금화가 가능하다.

스테이블코인을 포함한 가상자산은 투명성이 핵심이기 때문에 원론적으로 추적이 가능하다. 하지만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탈중앙화라는 특징도 있다. 대포통장이라도 현금을 이체·인출하면 금융 기관 전송망에 기록이 남는다. 개인 가상자산 거래도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기록이 남지만, 가상자산을 주고받는 지갑(계좌)은 실명이 아닌 무작위 숫자·영어로 되어 있어 추적이 어렵다. 가상자산을 세탁하는 '믹싱' 또는 '텀블러'까지 거쳤다면 추적은 한층 더 어려워진다.

국내에서는 인터넷 쇼핑몰이나 중고 거래에 허위 판매 글을 올린 뒤, 물품을 구매하려는 사람으로부터 돈을 가로채는 속칭 '오다 장집 사기'에도 스테이블코인이 활용되고 있다. 수억원 규모의 대규모 사기가 아닌 수십만원의 소액 사기조차 스테이블코인으로 범죄 자금을 세탁하는 것이다.

실제 B씨는 중고 거래 사이트에 크리드 향수를 판매한다는 글을 보고 연락한 피해자에게 "돈을 먼저 입금하면 향수를 주겠다"고 속여 가로챈 22만원을 대포 통장으로 옮긴 뒤, 테더로 교환해 현금화한 혐의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