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은 보험사들이 무·저해지 상품의 해지율을 높게 가정해 이익을 부풀렸다고 판단, 보험료 납입 완료 시점에 다가갈수록 해지율이 0%에 수렴하도록 가정하는 새로운 회계제도(IFRS17)의 원칙을 마련했다. 무·저해지 상품은 보험료 완납 전 계약을 해지하면 해지환급금이 아예 없거나 적은 상품을 뜻한다. 계약해지 고객이 많을수록 보험사의 이익이 증가하는데, 보험사는 해지율이 높다고 전제해 상품의 수익성을 부풀렸다는 것이 금융 당국의 지적이다.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은 지난 4일 김소영 금융위 부위원장 주재로 제4차 보험개혁회의를 개최해 'IFRS17 주요 계리가정 가이드라인'과 '보험부채 할인율 현실화 연착륙 방안'을 논의했다고 7일 밝혔다. 금융 당국은 지난 5월 킥오프 회의에서 '건전성 관리를 통한 신뢰회복'을 보험개혁회의의 핵심과제로 발표한 뒤 학계·업계·전문가 실무반을 만들어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보험업계에만 적용되는 회계제도인 IFRS17은 할인율과 손해율, 해지율, 위험률 등을 고려해 보험부채를 현재 가치로 평가한다. 보험부채는 보험사가 고객에게 보험금을 지급하기 위해 쌓는 책임준비금을 의미한다. 준비금을 얼마나 보유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선 미래 손해율 등을 예측해야 하는데, 일부 보험사가 단기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가정을 적용했다는 게 금융 당국의 판단이다.
금융 당국은 특히 무·저해지 상품의 해지율 가정이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무·저해지 보험은 보험료 납입기간 중 계약을 해지하면 보험사가 돌려주는 해지환급금이 아예 없거나 적은 상품을 뜻한다. 보험료 납입 완료 전에 계약을 해지하는 고객이 많아질수록 보험사의 이익이 늘어난다. 그런데 다수 보험사는 관련 통계가 없다는 이유로 무·저해지 상품의 해지율을 높다고 전제해 상품의 수익성을 부풀렸다.
금융 당국은 해외사례와 산업통계를 분석해 보험료 완납시점 해지율이 0%에 수렴하는 모형 중 '로그·선형모형'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경험통계가 쌓일 때까지 이를 적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보험료 납입 기간에 가까워질수록 계약 해지에 따른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고객이 많기 때문에 보험료 완납 시점에는 해지율이 0%가 될 것이란 가정이다.
보험사가 다른 모형을 적용하길 원한다면, 감사보고서·경영공시에 그 이유와 원칙모형(로그·선형모형)과의 차이점 등을 상세히 공시해야 한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한 보험사의 해지율 가정을 언급하며 "기대이익은 연속적으로 올라가는데, 해지율은 연속적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라며 "예외적인 모형을 사용했을 때와 원칙 모형을 사용했을 때를 비교해 명확히 설명하라는 취지로, 왜 이 회사의 수익이 더 좋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라고 설명했다.
보험사는 단기납 종신보험의 해지율은 낮게 설정해 이익을 부풀린 것으로 나타났다. 단기납 종신보험은 5~7년 동안 보험료를 납입한 뒤, 10년 시점에 계약을 해지하고 낸 보험료의 120~130%를 환급받는 상품이다. 보너스가 지급되는 10년 시점의 해지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데, 보험사는 이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금융 당국은 단기납 종신보험의 해지율을 30% 이상으로 설정해야 한다고 봤다. 단기납 종신보험과 유사한 구조인 일시납 저축성보험의 11차년도 평균 해지율이 29.4~30.2%라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손해율 가정을 경과기간과 담보별로만 구분하고 연령을 고려하지 않은 점도 문제로 제기됐다. 가령 상해수술 담보의 손해율은 30대가 89%, 40대가 103%, 50대가 140%로 나이가 많아질수록 늘어나는데, 이를 반영하지 않아 보험사의 수익성 지표인 보험계약마진(CSM)을 잘못 산출했다는 것이다. 금융 당국은 통계가 충분한 경우에는 연령별 손해율을 직접 산출하되, 직접 산출이 어렵다면 경과기간별 연령합산 손해율과 연령별 상대도를 활용해 간접적으로 산출하라고 권고했다.
금융 당국은 이 같은 계리가정 가이드라인을 올해 연말 결산부터 적용하되, 물리적 한계가 있는 경우에 한해 내년 1분기까지 반영할 수 있도록 했다. 지난해 8월 발표한 '할인율 단계적 현실화 방안'은 올해부터 시행 중이지만, 금리 하락으로 속도 조절 필요하다고 판단, 최종관찰만기를 30년으로 확대하고 3년간 단계적으로 적용해 나갈 방침이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이번 가이드라인을 두고 "정말 수익성이 안정적이고 변동성이 작은 회사가 어디인지 알아볼 수 있는 옥석가리기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