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가 금융 시장에서 안착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 대선을 앞두고 CBDC에 대해 줄곧 반대 입장을 드러내 온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상승세를 타고 있기 때문이다. 달러화를 발행하는 세계 최대 금융 시장인 미국이 외면할 경우 글로벌 결제 수단으로써 CBDC의 가치는 크게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3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지난달 30일 정례회의를 열고 한국은행의 CBDC 시스템에서 이뤄지는 토큰 기반 지급·이체 서비스를 혁신금융서비스로 신규 지정했다. 이에 따라 KB국민은행과 신한은행, 우리은행, 하나은행, IBK기업은행, NH농협은행, BNK부산은행 등 7곳이 사업자로 참여하기로 했다.
KB국민은행은 세븐일레븐과 교보문고 등에서 CBDC를 이용한 결제를 지원하기로 했다. 신한은행은 CBDC의 테스트 가맹점에 자체 운영 중인 음식 배달 애플리케이션(앱)인 ‘땡겨요’를 추가하기로 한은, 금융 당국과 합의했다. NH농협은행도 계열사인 하나로마트 등에서 결제 수단으로 CBDC를 활용하는 방안을 테스트할 방침이다.
CBDC는 발권력을 가진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하는 전자 형태의 화폐다. 비트코인 등 가상자산이 새로운 결제 수단으로 떠오르자, 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가 이에 대응해 중앙은행 차원의 CBDC를 발행하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지난 5월 열린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에서 “CBDC를 통해 화폐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게 될 것”이라며 “특히 국경 간 거래에서 큰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한은은 지난 4월부터 국제결제은행(BIS)과 미국·영국·일본·프랑스·스위스 등 5개 기축통화국을 비롯한 7개국 중앙은행 등과 손잡고 ‘아고라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이 프로젝트는 토큰화된 은행 예금과 중앙은행 화폐 등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국가 간 지급결제 시스템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업비트 투자자보호센터는 “토큰화된 중앙은행 화폐를 쓴다는 점에서 사실상 CBDC의 국제적 활용을 파악하는 실험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최근 한국을 비롯한 아고라 프로젝트 참여 국가들의 계획에 중대한 변수가 생겼다. 오는 5일(현지 시각) 치러지는 미국 대선을 코 앞에 두고 ‘친(親)비트코인, 반(反)CBDC’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혀 온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눈에 띄게 올라간 것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2월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CBDC는 개인의 자유로운 금융 거래와 경제 활동을 정부가 감시하고 통제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반면 가상자산에 대해서는 집권 후 규제를 대폭 완화하고, 국가 전략 자산에 비트코인을 추가하겠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공화당은 7월 발표한 정책강령(정강)에 중앙은행의 CBDC 발행에 반대한다는 내용을 명시하기도 했다.
금융 시장에서 CBDC와 가상자산은 서로 대척점에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CBDC는 중앙은행의 통제력을 높이는 수단이지만, 가상자산은 ‘탈(脫)중앙화’를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과거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을 지냈던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CBDC는 현재 달러화가 가진 여러 문제점을 해결할 만한 잠재력을 가졌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미국 보수층은 CBDC가 개인의 금융 거래 자유를 침해하고, 총기나 석유 구매를 규제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는 점을 들어 반대해 왔다.
만약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아고라 프로젝트에서 미국은 이탈할 가능성이 크다. 전 세계 무역 결제 통화의 44% 이상을 차지하는 달러화가 제외될 경우 새로운 국가 간 결제 수단으로 꼽히는 CBDC의 활용 가치도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반면 비트코인을 포함한 주요 가상자산에 대한 투자 수요는 빠르게 늘고 있다. 가상자산업계 관계자는 “미국 보수층과 달리 중국 등 일부 국가는 금융 시장 통제와 자본의 해외 유출 방지 등의 목적으로 CBDC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면서 “미국 대선 이후 CBDC와 가상자산의 새로운 금융 패권 경쟁이 가열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