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라 게라 리히텐슈타인 총리실 금융시장혁신국장이 지난 9월 5일 서울 강남구 해시드오픈리서치 사무실에서 조선비즈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태호 기자

‘알프스의 강소국’ 리히텐슈타인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가상자산과 블록체인 기술을 제도권으로 받아들인 국가다. 지난 2020년 1월, 리히텐슈타인의 가상자산 기본법인 ‘가상자산과 신뢰할 수 있는 서비스 제공자 법(TVTG)’이 시행됐다. TVTG는 ‘블록체인 법’이라고도 불리며 가상자산 산업을 위해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법률로 평가받는다.

TVTG의 목적은 가장자산 이용자를 보호하고 가상자산 거래에 대한 신뢰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 법은 블록체인 활용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의 권리와 의무를 명시한다. 가상자산 사업자들은 리히텐슈타인 금융 당국의 감독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가상자산에 대한 개념 정의를 법령으로 명시해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가상자산 발행을 명확하게 규율한다. TVTG는 글로벌 가상자산 규제의 교본으로 자리 잡아 유럽연합(EU)의 가상자산 규제인 미카와 아랍에미리트(UAE) 및 카타르의 가상자산 관련 제도 제정에 영향을 미쳤다.

세계 최초의 가상자산법 제정을 주도한 곳은 리히텐슈타인 총리실 직속 부서 금융시장혁신국이다. 리히텐슈타인 정부는 2016년부터 규제 설립을 위해 업계와 소통하기 시작했으며 2019년에 이 법을 만들었다. 금융시장혁신국을 총괄하는 클라라 게라(Clara Guerra·43) 국장은 지난 5일 조선비즈와 인터뷰에서 “세계 최초로 만든 가상자산법은 리히텐슈타인 내 가상자산 산업 생태계가 성장하는 데 자양분이 됐다”며 “이 법 덕에 리히텐슈타인은 디지털 금융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다”고 밝혔다.

지난 1월 클라라 게라 리히텐슈타인 총리실 금융시장혁신국장이 2024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에 참여한 모습. /LCX 제공

그의 말처럼 리히텐슈타인은 빠르게 가상자산 산업 발전을 이뤄냈다. 리히텐슈타인 내 등록된 가상자산사업자 수는 27개로 한국에서 영업 중인 가상자산사업자 수(22개)보다 많다. 리히텐슈타인 기업이 개발한 블록체인 멀티버스엑스의 경우, 총예치자산(TVL)이 1억1300만달러(약 1500억원)에 달한다. 한국의 대표 블록체인이라 불리는 위믹스의 TVL은 1100만달러(약 147억원)에 그친다. TVL은 블록체인 내 예치된 이용자들의 자산 규모로 블록체인의 유동성과 인기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다.

게라 국장은 “리히텐슈타인 기업은 예술품을 가상자산화하는 등 실물자산을 가상자산으로 만드는 시도를 통해 금융 소비자들의 가상자산 이용 경험을 늘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TVTG와 같은 명확한 법률은 확실한 규제로 이용자를 보호하면서도 기업이 혁신을 시도할 수 있는 안전한 환경을 보장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금융시장혁신국은 단순히 법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연구하면서 이를 지원하기 위한 인프라 발전과 추가 규제 설립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금융 혁신을 위한 정책 당국의 역할에 대해 게라 국장은 “규제가 혁신을 억제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적절한 규제는 혁신을 가능케 하고 소비자의 신뢰를 조성하는 데 필수적이다”라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그는 ‘규제 시행 시기’와 ‘접근 방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게라 국장은 “규제가 너무 일찍 개입하면 기술 발전을 방해하고 반면, 너무 늦게 규제가 마련되면 소비자 및 금융업 전체가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한국을 찾은 게라 국장은 한국 금융위원회와 만나 리히텐슈타인의 가상자산 규제 노하우를 공유하기도 했다. 지난 5일, 게라 국장은 정부서울청사에 방문해 김성진 금융위 가상자산과장 등과 면담했다. 게라 국장은 “아직 한국 금융 당국과 구체적인 협업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다”면서도 “리히텐슈타인이 TVTG를 시행하고 4년 동안 얻은 경험을 전파하고 향후 가상자산 제도 관련해 대화의 끈을 놓지 않기로 했다”고 전했다.

클라라 게라 리히텐슈타인 총리실 금융시장혁신국장이 지난 9월 5일 서울 강남구 해시드오픈리서치 사무실에서 조선비즈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태호 기자

게라 국장은 블록체인 기술이 금융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비유컨대, 전기는 양초를 개량하다 만들어진 게 아닌 완전히 새로운 발명품이듯이 블록체인도 기존 금융 디지털 전환의 연속선상이 아닌 별개의 산업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게라 국장은 “블록체인은 금융 분야에서 이용자에게 더 많은 통제권과 선택권을 쥐여 주며 지금의 금융 시스템에 내재한 위험을 줄인다”고 부연했다.

게라 국장은 블록체인의 효용성을 언급하며 오스트리아 출신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잠언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다”를 인용했다. 그는 “블록체인이라는 새로운 기술은 금융 거래가 중개자 없이도 이뤄질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까지 금융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은행 등 전통 금융사를 거쳐야 했지만 블록체인을 사용하면 중개업자를 끼지 않고 디지털화된 자산을 이용자가 직접 주고받을 수 있다”며 “우리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꾸는 격이다”라고 설명했다.

주요 가상자산 및 블록체인 프로젝트가 유럽이 아닌 미국에 집중돼 있다는 질문에 게라 국장은 “많은 기업과 자본이 미국에 몰려있지만 불확실한 규제 환경이 미국 가상자산 산업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은 혁신을 주도하고 유럽은 규제를 내세운다는 통념이 있지만, 유럽 각국 정부는 가상자산 관련 안전한 환경을 조성해 기업이 마음 놓고 혁신에 도전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고 강조했다.

게라 국장은 유럽 국가 중에서도 리히텐슈타인을 금융 혁신의 선두 주자로 우뚝 세우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는 “금융시장혁신국은 가상자산과 블록체인의 지평이 확장되도록 업계와 계속해 소통할 것이다”고 말했다. 금융시장혁신국의 최종 목표를 묻자 그는 “단순히 발전된 금융 시스템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라며 “디지털화된 경제가 일상 속에 스며들 수 있도록 블록체인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고 답했다.

☞리히텐슈타인은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있는 내륙 국가. 전체 국토 넓이가 160㎢로 서울의 4분의 1 정도고, 인구도 4만명을 갓 넘긴다. 외형은 작지만 글로벌 경제에서 리히텐슈타인 지위는 약소하지 않다. 국내총생산(GDP)은 76억달러(약 10조1200억원)로 집계되며, 1인당 GDP는 23만3000달러(약 3억1035만원)로 1인당 GDP가 전 세계에서 가장 높다. 리히텐슈타인, 스위스,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4개국이 결성한 유럽자유무역연합체(EFTA)는 전 세계 교역 규모 9위에 달한다.

☞클라라 게라 리히텐슈타인 총리실 금융시장혁신국장은

▲비아드리나 유럽대학교 문화학·철학 박사 ▲글로벌매틱스 법률 고문 ▲언타이틀 INC 파트너 ▲엑스유엑스포낸셜대학교 응용과학부문 자문위원 ▲유럽블록체인협회 공동의장 ▲리히텐슈타인 총리실 금융시장혁신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