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정다운

“자살한 사람이 생전에 우울장애 진단을 받지 않았어도 법원으로서는 사망한 사람의 나이와 성행, 그가 자살에 이를 때까지의 경위와 제반 정황 등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살에 이른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대법원 1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집안 욕실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A씨의 가족이 현대해상 등 5개 보험사를 상대로 제기한 보험금 청구 소송에서 보험사 손을 들어준 원심을 지난 5월 9일 파기환송하며 이렇게 판시했다. A씨 가족은 보험사가 사망보험금 등을 지급하지 않기로 결정하자 소송을 제기했다. 가입자가 고의로 자신을 해친 경우에는 보험금이 지급되지 않는다. 다만 심신상실 상태에서 자살한 것으로 판명될 때는 보험금을 받을 수 있어, 이 재판은 A씨가 심신상실 상태서 사망했는지가 쟁점이었다.

원심은 A씨가 심신상실 상태가 아니었다고 보고 원고 패소 판결했다. 실제 A씨는 우울증 등 정신질환 치료를 받은 적인 한 차례도 없었고, 의사로부터 정신질환 진단이나 의심 소견을 받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A씨가 사망 전 업무·육아 스트레스를 겪은 데다 직장동료 등에게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던 점 등을 근거로 A씨가 극단적 선택 당시 심신상실 상태에 있을 것으로 추정, 보험사가 A씨 가족에게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봤다.

자살한 보험 가입자에게 보험금을 지급할 것인지를 두고 법원 판단이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보험금을 노리고 자살하는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기 위해 예외조항 적용을 엄격하게 판단했는데, 최근 들어서는 기준이 다소 완화됐다는 게 법조계 분석이다.

26일 보험업계와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은 지난해 5월부터 1년 동안 보험사가 자살한 보험 가입자의 가족에게 사망보험금 등을 지급해야 한다고 네 차례 판결했다. 모두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원심판결을 뒤집은 사례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뉴스1

보험 약관에는 가입자가 고의로 자신을 해친 경우 보험금이 지급되지 않는다고 명시돼 있다. 자살도 자신을 해친 경우에 해당한다. 다만 정신질환이나 심신상실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살한 경우에는 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는 예외조항이 있다.

법원은 지금껏 이 예외조항을 엄격하게 판단했다. 우울증 등 정신질환으로 여러 차례 치료를 받았거나 의사의 소견서가 있었더라도 자살 당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었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없는 이상 예외조항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판결이 많았다. 자살하기 전 지인과 일상 안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로도 심신상실이 인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판단 기준이 달라졌다는 게 법조계 시각이다. 사망자가 남긴 말이나 기록, 주변인들의 진술, 자살 당시의 행태 등 주위 정황을 통해 심신상실이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지난 5월 전남 목포의 갯바위에서 투신한 B씨의 가족이 보험사를 상대로 한 상고심에서 원심판결을 뒤집고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B씨가 자살 방법 등을 계획한 정황이 있고, 이 과정에서 친구와 일상 안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만으로는 B씨의 심신상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취지다.

이 같은 변화로 자살한 보험 가입자에 대한 사망보험금 지급 사례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보험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최혜원 씨앤파트너스 변호사는 “법원이 확정적으로 자살 보험금 사안에 대한 입장이 변했다고 말할 순 없다”라면서도 “요건이 완화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최근 대법원판결이 나오면서 과거에는 (원고가) 승소하지 못할 만한 사건도 원고 승소 판결이 나오는 사례가 많아졌다”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