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벨시 비트고 CEO가 지난 3일 오후 서울 광진구 그랜드워커힐 서울에서 조선비즈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상훈 기자
“19세기 미국의 근대 은행 건물은 하나같이 대리석으로 지어졌어요. 대리석은 비싸고 무거워서 자재를 쉽게 옮길 수 없죠. 그런데 왜 당시 은행이 대리석으로 건물을 올렸을까요? ‘우리는 도망가지 않고 묵직하게 이 자리에 있을 것이다’라는 신뢰를 고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장치입니다. 비트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금융그룹 및 SK텔레콤과 협업을 통해 비트고가 한국 시장에 계속 남아있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마이크 벨시(Mike Belshe·53) 비트고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3일 조선비즈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비트고는 2013년 설립된 가상자산 수탁 전문 금융사다. 이 회사는 기관용 가상자산 지갑을 개발하고 가상자산을 보관한다. 전 세계 50여개국의 1500개 이상 기관이 비트고의 수탁 서비스를 이용하는 중이다. 솔라나·아발란체 등 유명 블록체인 개발사와 미국 내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를 운용하는 해시덱스도 비트고의 고객이다. 현재 비트고가 관리하는 가상자산은 700억달러(약 93조원)에 육박하며 비트코인 시가총액의 20%가량이 비트고의 수탁 서비스를 거쳤을 정도로 비트고는 글로벌 최대 규모 가상자산 수탁사다.

비트고는 국내 금융그룹 및 대기업과 손잡고 한국 시장 진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올해 초 비트고는 하나은행과 국내 합작 법인 비트고 코리아를 설립했다. 이달 초엔 비트고 코리아의 사무실도 열었으며 국내 직원 고용도 이뤄졌다. 최근엔 하나금융지주와 SK텔레콤이 비트고 코리아 지분 투자에 참여했다. 국내 사업 파트너로 여러 금융사 중 하나은행을 택한 이유를 묻자 벨시 CEO는 “하나은행은 적극적으로 가상자산 사업 참여 의지를 보여 이곳과 손을 잡았다”고 답했다.

비트고 코리아는 비트고처럼 국내에서 기관용 수탁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 국내에서 가상자산 수탁업을 하려면 가상자산사업자(VASP) 신고가 필요한데 이에 대해 벨시 CEO는 “내년 초를 (비트고 코리아의) VASP 신고 및 본격적인 사업 출항 시기로 잡았다”고 말했다.

또한 “비트고 코리아의 사업 목표는 한국 기업이 더 안전하게 가상자산 산업에 뛰어들 수 있게 수탁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미 한국에 가상자산 수탁 기업이 있지만 비트고의 기술력은 차원이 다른 수준이다”라며 “한국 금융 시장에 ‘비트고 코리아 기술력이라면 믿을 만하다’는 인식을 심고 궁극적으론 가상자산 산업이 한국의 제도권에 안착되게 보탬을 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비트고의 가상자산 수탁 서비스를 이용하는 주요 고객사. 미국 헤지펀드 운용사인 판테라 등이 비트고의 고객사다. /비트고 제공

가상자산에 대해 보수적인 국내 금융 당국의 태도에 대해 벨시 CEO는 “금융 당국이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나쁠 게 없다”고 밝혔다. 그는 한국의 엄격한 담보 대출 규제와 공매도 금지를 사례로 들었다. 벨시 CEO는 “미국의 경우, 유연한 담보 대출 시장이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의 시발점이 됐다”며 “2021년엔 미국의 상장사 게임스톱 주식이 150% 공매도 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해 주가가 20달러(약 2만7000원)에서 480달러(약 64만원)까지 널뛰는 사례가 있었다”고 했다. 그는 “당시 미국 금융 당국은 제 기능을 못 했다”고 평가했다. 벨시 CEO는 “한국 정부는 ‘시장 질서 유지’라는 원칙을 지키고 있고 이는 글로벌 가상자산 시장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일조한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한국 정부가 블록체인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수용하는 데 회의적이기보다는 가상자산 시장을 개방했을 때 외국 자본이 한국에 유입되고 생길 수 있는 문제에 초점을 맞춰 고민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새로운 기술을 수용하려는 논의가 늦어지는 동안 금융 혁신의 기회는 다른 나라에서 먼저 발생한다”고 했다.

비트고를 창업한 벨시 CEO는 미국 실리콘밸리 개발자 출신이다. 글로벌 정보기술(IT)업계에서는 벨시 CEO를 두고 인터넷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작성한 인물로 평가한다. 벨시 CEO가 20년 전 창업했던 룩아웃은 세계 최초로 이메일 검색 시스템을 선보였으며 이후 마이크로소프트(MS)에 인수됐다.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구글 크롬 브라우저는 특유의 간편한 이용자 경험(UX)을 강점으로 내세워 한때 웹 브라우저 점유율 95%를 장악했다. 벨시 CEO가 개발에 참여한 SPDY 프로토콜은 웹 성능을 대폭 개선하며 오늘날 웹 콘텐츠 전송 기술의 표준인 HTTP 2.0 탄생에 영향을 미쳤다.

벨시 CEO는 실리콘밸리에서 그가 일궈 온 성과에 대해 “늘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몰두했을 뿐이다”라며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이어 “가상자산 산업에 뛰어든 동기도 결국 금융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열의에서 출발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비트코인을 처음 접했을 때 ‘더 발전된 화폐의 형태와 기능은 무엇일까’ 고민했다”고 말했다. “결국 화폐의 본질은 금융을 기록하고 추적하는 데 쓰이는 도구다”라며 “오늘날 금융 시스템의 문제인 불투명함과 금융 사고 발생 위험성을 해결하는 도구가 필요한데 디지털화된 화폐가 해결 수단으로 안성맞춤이다”라고 주장했다.

마이크 벨시 비트고 CEO가 지난 3일 오후 서울 광진구 그랜드워커힐 서울에서 조선비즈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상훈 기자

인터넷 산업 발전을 이끈 인물답게 벨시 CEO는 블록체인 산업의 발전을 인터넷의 발전에 비유했다. 일반인도 블록체인 기술을 손쉽게 사용하기까지 남은 시간을 묻자 그는 “앞으로 20년은 더 필요하다”고 답했다. 벨시 CEO는 “인터넷의 경우, 1960년대에 처음 태어나 1990년대에 웹 브라우저가 구축됐다”며 “블록체인을 인터넷의 초기 발전 30년에 비교하면 처음 10년이 지난 셈이다”라고 말했다.

인터뷰 말미 비트고와 같은 가상자산 수탁사가 미래에 전통 은행을 대체할 것으로 보는지 묻자, 벨시 CEO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렇다”고 답했다. 곧이어 “특히 결제 부문에서 은행은 기술의 발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미 페이팔과 벤모와 같은 핀테크 서비스가 기존 은행보다 더 진보된 형태의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며 “여전히 우리는 은행을 이용하고 신용카드로 결제하지만 금융 기술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벨시 CEO는 금융업의 주도권이 은행에서 가상자산 수탁사로 넘어가는 구체적인 시점에 대해서는 “딱 잘라 연도를 말하긴 어렵다”면서도 “은행은 기술 기업이 아니라는 금융사의 태생적 특성 때문에 가상자산을 취급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라며 “언젠가 가상자산 이용이 은행 이용을 앞지를 것이고, 가상자산 수탁사는 점점 은행처럼 발전할 것이다”라고 힘줘 말했다.

☞마이크 벨시 비트고 CEO는

▲캘리포니아 폴리테크닉 주립대 컴퓨터공학 학사 ▲HP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넷스케이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굿테크놀로지 엔지니어링 디렉터 ▲룩아웃 공동창업자 ▲마이크로소프트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구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