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 횡령도 모자라 손태승 전 회장 친인척의 부당대출까지 터진 우리은행은 최근 부랴부랴 여신관리 제도 개선 방안을 내놨다.
상사의 부당한 지시를 내부에 비밀리 제보할 수 있는 ‘불합리한 여신점검 가능 프로세스’를 구축하는 등, 내부통제 강화의 고삐를 조였다. 손태승 전 회장 경우처럼 고위 인사가 부하 직원을 통해 부당한 대출을 시행할 수 없도록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반복되는 금융사고를 막기 위해 각 은행들이 절치부심 내부통제 강화 방안을 내놓고 있다. 당국 역시 은행의 태만해진 조직 문화 다잡기에 나섰다. 하지만 금융사고를 완전히 막기는 어려움이 있어 접근방식을 달리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28일 은행업계 등에 따르면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은 여신 심사 시 친인척 관련 혹은 위계에 의한 대출 심사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는 시스템을 마련해두었거나 이를 업그레이드하는 등, 내부통제 강화에 나서고 있다.
우리금융처럼 잇따른 횡령과 비리 사고로 인해 최고경영자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몰리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다.
◇ 여신 철벽심사, 친인척 대출 과정에 개입 금지
각 은행의 여신심사 과정을 보면 담당자는 본인의 직계 가족을 심사할 수 없다는 점을 기본으로 한다. 심사 과정에서 이해 관계자나 친인척 관련 여부를 확인하는 경고창을 여러 차례 띄우기도 한다. 상시 모니터링도 운영한다.
KB국민은행은 ‘기업여신 취급 제한’이라는 매뉴얼을 마련해뒀다. 취급 부점의 직원과 배우자, 본인 및 배우자의 직계존비속, 이에 해당하는 사람이 대표이사(경영실권자)인 법인 등은 여신을 내주지 못하게 했다.
신한은행은 여신 심사시 직계 가족 제한뿐 아니라 특이 사항이 있는 경우,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예를 들어 부산 소재의 기업 여신을 서울 지역 지점에서 조회하거나 심사하거나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통상적으로 이뤄지는 여신에서 벗어난다 싶으면 리스크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나은행은 ‘하나인의 거래 지침’을 통해 ‘임직원은 본인, 친지(배우자, 직계 존‧비속 및 4촌 이내의 방계혈족과 배우자의 4촌 이내의 인척을 말하며 법률상의 개념은 아님), 기타 이해관계인의 여신거래에 대한 승인 의사결정(심사, 금리결정, 담보평가 포함)에 관여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명시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곳은 무엇보다 우리은행이다. 2022년 700억원대 횡령에 이어 최근 100억원대 횡령, 전임 회장 친인척 부당대출 의혹 등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은행은 시스템 보완이 시급한 상황이다.
지난 7월 여신 취급시 불합리한 여신점검 가능 프로세스를 추가했다. 상급자 지시에 의한 불합리한 여신취급시 전산 신고채널을 포함했는데 검사 부서만 열람이 가능하도록해 내부통제 강도를 높였다. 문제가 있는 영업점장의 여신전결권을 하향 조정하는 제도와 연체 여신 책임도 강화했다.
◇ 내부통제 강화로는 한계…직업윤리·조직문화 개선 시급
문제는 직원 개인의 의지에 따라 구멍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이다. 여신 심사 단계에서 ‘문제 없음’ ‘해당사항 없음’을 택하게 되면 심사는 문제 없이 이뤄진다. 대출 심사 등도 위계에 의해 이뤄진다면 막아낼 방법도 없다. 특히 여신을 받으려는 직원이 아니거나 소속되지 않은 다른 영업점에서는 대출이 가능하다.
가계대출보다 기업대출의 경우가 더욱 심각하다. 기업대출은 여신 특수성, 영업점장이 재량권을 발휘할 수 있는 만큼 문제가 발생하기 쉬운 구조다.
복수의 은행권 관계자는 “여신 심사 과정에서 이해관계자 대출 등은 직원 개인의 양심에 맡겨야 하는 부분”이라면서 “전국 영업점에서 이뤄지는 모든 여신 과정을 들여다 볼 수 없고 은행 직원의 친인척, 이해관계자 모두를 제한할 수도 없는 부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결국 횡령이나 부당 대출을 막는 것은 조직문화의 차원인 것이지 시스템 상으로 제한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최근 금융지주들이 윤리 의식을 강조하면서 조직문화 차원의 내부통제를 강화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진옥동 신한금융그룹 회장은 올해 하반기 경영포럼에서 전 임직원들에게 “우리의 성과는 고객에 이롭고 사회에 정의로워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모든 임직원들이 업무에 임할 때 법규와 업무기준을 철저히 준수하며 ‘과정의 정당성’을 지켜야 한다”고 당부했다.
함영주 하나금융그룹 회장도 올초 신년사에서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내실을 다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다소 늦더라도 정확하고 올바른 길을 향해 착실하게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금융당국이 조직문화 단속에 나서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금융감독원 역시 준법‧윤리의식이 조직내 스며들 수 있도록 조직문화 감독 수단을 새로 마련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해외에선 이미 조직문화 관련 감독당국이 역할을 하고 있다. 네덜란드에선 중앙은행을 중심으로 지난 2011년 지배구조, 변화관리, 조직 심리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조직을 신설했다. 호주에선 건전성감독청(APRA)이 종합 리스크관리 규정을 통해 조직문화에 대한 이사회의 책임, 조직문화에 대한 정기평가 등을 의무화했다.
성수용 한국금융연수원 교수는 “금융회사는 고객의 돈을 운용한다는 점에서 일반 기업의 윤리 경영보다 높은 수준의 윤리 경영이 필요하다”면서 “일선 현장의 영업지점의 직원부터 최고 경영자까지 같은 잣대로 책임과 의무를 다했는지 평가 받고 그에 대한 상벌이 이뤄지는 문화 확립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IT조선 한재희 기자 onej@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