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정서희

서민 금융 공급을 확대하겠다던 정부가 정작 취약 계층을 위한 정책금융 상품인 ‘햇살론’ 공급을 올해 1조원 넘게 줄이기로 한 것으로 확인됐다. 햇살론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 어려운 저소득·저신용자나 빚 수렁에 빠진 연체자가 주로 이용하는 상품이다.

4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오기형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서민금융진흥원은 올해 햇살론(근로자햇살론·햇살론·햇살론15·햇살론뱅크·햇살론카드)에 총 5조원을 공급하기로 했다. 이는 전년 대비 1조500억원(17.4%) 줄어든 규모다. 서금원은 취약 계층을 위한 정책금융 상품에 보증을 지원하는 금융위원회 산하 공공기관이다.

‘근로자햇살론’의 공급 목표액은 지난해 3조2000억원에서 올해 2조6000억원으로 6000억원(18.8%) 삭감됐다. 지난해 수요가 몰리며 조기 소진돼 공급 목표치보다 1400억원이 추가 집행됐음에도, 올해 공급을 줄이기로 한 것이다. 근로자햇살론은 연 소득 3500만원 이하 또는 개인 신용평점 하위 20%에 해당하면서 연 소득이 4500만원 이하인 저소득·저신용 근로자를 위한 상품이다. 연 11.5% 이내 금리로 최대 2000만원까지 3년 또는 5년 동안 빌릴 수 있다.

대학생, 취업준비생, 중소기업 재직 사회초년생을 대상으로 하는 ‘햇살론유스’의 공급 목표액도 지난해 3000억원에서 1000억원으로 2000억원(66.7%) 깎였다. 긴급 생계 자금 및 고금리 대출 대환 자금을 지원하는 ‘햇살론15′는 공급 목표액이 1조3000억원에서 1조500억원으로 2500억원(19.2%) 줄었다. 햇살론15는 대부업이나 불법 사금융 등 고금리 대출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최저 신용자들을 제도권 금융으로 포용하는 것이 목적인데, 정부가 이들의 재기 기회를 줄이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지난해 10월 31일 서울 시내 한 재래시장에서 상인들이 윤석열 대통령의 2024년도 정부 예산안에 대한 국회 시정연설을 시청하고 있다. /뉴스1

이는 서민·취약계층에 대한 금융 지원을 확대하겠다는 정부 기조와도 맞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올해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장기간 지속돼 온 고금리로 생계비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며 “서민 금융 공급 확대를 통해 고금리 장기화에 따른 부담 완화 노력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곧이어 김주현 금융위원장도 “더 비상한 각오로 서민, 취약계층에 꼭 필요한 금융 지원이 제때 공급될 수 있도록 모든 역량을 다하겠다”고 했다.

반면 청년 자산 형성 지원 사업에 편성된 예산은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서금원은 올해 청년도약계좌와 청년희망적금에 각각 7925억원, 5709억원을 공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는 전년 대비 각각 4249억원(115.6%), 2107억원(58.5%) 증가한 규모다.

금융권 관계자는 “정부가 총선을 앞두고 서민과 취약 계층을 외면하고 청년 표심 잡기에 몰두하는 것 아니냐”며 “적어도 지난해 한도가 조기 소진된, 수요가 많은 정책금융 상품의 공급은 늘리는 게 맞다고 본다”고 했다. 서금원은 하루 만에 한 달 치 한도가 소진돼 ‘오픈런’ 대출로 불리는 ‘최저신용자 특례보증’과 ‘소액생계비대출’의 올해 공급 목표액을 지난해와 같은 2800억원, 1000억원으로 동결했다.

서금원 측은 “매년 정책금융 상품 공급 계획은 보수적으로 잡고 있다”며 “예산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정책금융 상품 공급을 무한대로 늘릴 수 없다. 이제는 민간이 나서 서민 금융 지원 역할 맡아 그 비중을 확대해 가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