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이 홍콩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주가연계증권(ELS) 자율배상안에 대해 난색을 보이고 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최근 은행권에 홍콩 ELS 피해에 대한 선제적인 자율배상을 권고했다. 하지만 불완전판매 여부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명확한 기준 없이 자율배상을 하면 배임 등 더 큰 문제가 불거질 가능성이 있다는 게 은행권 입장이다.
14일 금융권에 따르면 은행권은 법무법인과 함께 홍콩 ELS 관련 배상안에 대한 검토에 들어갔지만, 내부적으로 자율배상을 하기는 쉽지 않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당국에서 안을 제시하기 전에 은행이 선뜻 불완전판매를 인정하고 어느 수준의 자율배상을 하겠다고 나서기가 어려운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금감원은 홍콩H지수 ELS 피해가 커지는 만큼 은행의 선제적인 자율배상을 요청했다. 앞서 이복현 금감원장은 지난 5일 "불법과 합법을 떠나 금융권 자체적인 자율배상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최소 50%라도 먼저 배상을 진행하는 것이 소비자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했다.
자본시장법상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투자자가 입은 손실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후에 보전해 주는 행위는 금지된다. 다만, 위법행위 여부가 불명확한 경우 사적화해의 수단으로 손실을 보상하는 행위를 예외로 인정하고 있다. 은행이 홍콩H지수 ELS 피해에 대해 배상에 나선다는 것은 불완전판매 가능성을 자인하는 셈이 된다. 이렇게 되면 은행이 금융소비자와 홍콩 ELS의 불완전판매 여부를 소송으로 다툴 경우 은행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투자자별 배상금을 넘어 금융 당국의 징계나 과징금 부과 측면에서도 은행은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없게 된다.
특히 은행권은 홍콩H지수 ELS 사태의 경우 라임 등 사모펀드 문제와는 다른 양상인 만큼 투자 사례별로 금융소비자보호법 위반 여부를 살펴봐야 해 자율배상이 더욱 어렵다고 주장한다. 홍콩H지수 ELS는 기존 사모펀드와 달리 상품 설계부터 문제가 있는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판매 직원이 투자자에게 설명 의무를 다했는지, 적합성의 원칙 등 금소법을 지켰는지를 따져야 한다.
만약 은행이 자율배상을 한다면 수만명에 달하는 홍콩H지수 ELS 투자자별 금소법 위반 여부를 살펴본 뒤 배상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후 금감원이 책임 분담 기준안을 내놓는다면 은행들은 또다시 이 기준안에 맞춰 배상 수준을 결정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결국 은행권은 이르면 이달 말 발표될 금감원의 홍콩 ELS 책임 분담 기준안을 기다리겠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시중은행 한 관계자는 "금감원의 책임 분담 기준안이 나오기 전까지 현실적으로 자율배상은 어려울 것"이라며 "나중에 과도하게 자율배상을 해서 배임이나 다른 문제가 생기는 것보다는 당국의 기준안에 따라 처리하는 게 낫다"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은행 대부분이 금감원의 기준안에 따라 법무법인의 검토를 통해 배상을 시작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금감원은 2019년 해외 금리연계파생결합펀드(DLF) 사태 당시 배상 기준안을 참고해 홍콩 ELS 책임 분담 기준안을 내놓을 방침이다. DLF 사태 당시 기본 배상률은 55%로 ▲65세 이상 ▲주부·고령 은퇴자 등에 해당하는지에 따라 최대 10%포인트까지 가산됐다. 투자자 책임 원칙은 20% 인정됐다. 금감원은 이번 홍콩 ELS 역시 ▲적합성 원칙 위반 ▲설명의무 위반 ▲부당 권유 등 불완전판매 유형을 분류하고, 나이·재산 상황 등을 따져 배상 수준을 달리할 것으로 보인다. 또, 홍콩H지수 ELS의 경우 재투자 비율이 높은 만큼 DLF 배상 기준안보다 투자자 책임 원칙을 더 크게 인정할 가능성도 있다.
금융 당국의 배상 기준안이 나와도 실제 피해 배상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것으로 보인다. 배상을 시작하면 은행이 투자자별로 배상 수준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일일이 건별로 상황을 들여다봐야 하는데 홍콩 ELS의 투자자가 수만명에 달하기 때문이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배상 기준안이 마련되면 금감원이 배상 기준안을 가지고 분쟁 조정을 하고, 은행은 분쟁 조정 사례와 기준안을 가지고 개별적으로 판단하게 된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