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지연 아동 치료와 관련된 제도가 안착할 때까지 치료사 문제와 상관없이 보험금을 지급해 고객 피해가 없도록 안내하겠다.”
지난 10월 27일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배포한 보도자료 내용이다. 강 의원은 전날 이성재 현대해상 대표와 만나 발달지연 아동 보험금 부지급 논란에 대해 논의한 뒤 “보험금을 우선 지급하겠다는 현대해상의 약속을 끌어냈다”고 홍보했다. 이후 이 대표의 국정감사 증인 출석은 돌연 취소됐다.
8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현대해상은 지난 11월 29일 강 의원실과 발달지연 아동 권리보호 가족연대(가족연대) 등과 만난 자리에서 보험금 지급 방안을 공개했다. 11월부터 내년 4월까지 보험금 신규 청구분에 한해 보험금을 지급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보험금을 청구해 부지급 결정이 난 가족연대 등에는 보험금을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현대해상이 지난 5월 발달지연 아동 보험금 지급과 관련해 민간치료사에 의한 치료는 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방침을 세우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발달지연 아동 치료는 언어·인지·미술·놀이·특수체육·감각통합 등 다양하다. 문제는 이 중 미술·놀이치료와 관련한 국가자격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분야는 대학원을 마치고 민간자격증을 취득해 발달센터 등에 취업한 치료사가 대신하는 실정이다. 하지만 현대해상은 이러한 민간치료사의 의료행위는 의료법 위반이어서 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민간치료사의 의료행위를 무조건 불법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금감원은 발달치료 목적으로 의사의 지도 아래 민간치료사가 ‘단순 보조’를 한 경우에는 보험금 지급 대상이라고 보고 있다. 민간치료사가 관여했다는 이유만으로 발달치료 전체에 대해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는 설명이다.
실제 부산지법은 현대해상이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와 미술심리치료사, 언어재활사 등을 상대로 제기한 3억96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언어·행동치료 프로그램이 의료행위라고 인정하고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 프로그램은 발달지연을 가진 아동들을 상대로 언어 및 의사소통, 사회성 등의 다양한 영역의 발달을 증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의학적 전문지식을 기초로 한 경험과 기능으로 시행된 치료행위에 해당한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판시했다.
현대해상은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으나 항소심 재판부도 “이 사건 프로그램의 내용이 일반 심리상담센터 등에서 제공되는 상담서비스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사정만으론 프로그램을 의료행위가 아니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법원 판결에도 현대해상이 민간치료사의 치료는 불법이라고 주장하자 대한소아청소년 행동발달증진학회 등 소아과 전문 단체는 지난 6월 기자회견을 열고 “발달지연 아동 치료 기회를 박탈했다”며 현대해상을 비판했다. 행동발달증진학회는 지난 8월 이사장 명의의 탄원서를 내고 “현대해상의 ‘민간치료사’라는 표현으로 인해 학문적으로 효과가 입증된 여러 치료의 신뢰성이 떨어졌다”며 “미술·놀이치료가 무자격자에 의해 행해졌다고 언급하는 것은 학문적으로도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는 지적이다”라고 했다.
결국 보험 가입자들은 보험금을 받기 위해 자녀의 발달지연 치료행위를 한 사람이 의료행위 자격이 있는지를 직접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가족연대 관계자는 “치료사 자격 정보를 보험사에 주지 않으면 보험금이 지급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라고 주장했다.
현대해상은 보험금 부지급 논란이 과하게 부풀려졌다고 해명했다. 현대해상은 발달지연 아동 치료와 관련해 청구된 보험금 중 98%는 정상적으로 지급됐고, 나머지 2%는 명백히 불법적인 청구여서 부지급한 사례라고 설명했다. 특히 심사 강화 안내가 있었던 지난 5월 보험금 지급률은 97.6%로 안내 후 지급률(98.4%)과 큰 차이가 없다고 강조했다. 현대해상 관계자는 “보험금 지급의 소급을 인정하면 제도개선에 협조해 왔던 다수의 고객과 의료기관의 상대적 피해가 우려돼 최초 청구고객 대상으로 6개월 지급 기준을 마련하게 됐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