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정다운

은행들이 조(兆) 단위 손실이 예상되는 홍콩H지수 연계 주가연계증권(ELS)을 판매했던 2021년에 금융 당국의 상품 판매 관행 점검에서 최하 등급을 겨우 면한 것으로 드러났다. 금융감독원이 당시 금융 소비자로 가장해 은행권의 상품 판매 관행을 점검한 결과 '미흡'에 해당하는 점수를 받은 것이다. 이는 상품 판매 과정에서 적합성 원칙이나 설명의무를 준수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는 의미다.

이에 더해 당시 은행에서 판매한 홍콩H지수 연계 ELS에 투자한 이들도 "은행에서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안전한 상품이라고 안내했다"며 '불완전판매'를 주장하고 있어 실제 불완전판매 사례가 다수 적발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29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감독원이 지난 2021년 11월부터 지난해 2월까지 은행권에 대한 미스터리 쇼핑을 진행한 결과 KB국민·신한·우리·하나·NH농협·IBK기업 등 은행 15개사의 점수는 평균 60.5점을 기록했다. 가장 낮은 등급인 '저조'를 겨우 벗어나 '미흡'에 해당하는 점수다.

금감원은 실제 소비자로 가장한 사람들이 기업의 서비스나 제품을 경험하고 평가하는 미스터리 쇼핑을 실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은행이 상품 판매 시 적합성 원칙과 설명 의무를 준수하고 있는지, 부당 권유 행위가 발생하는지 등을 평가해 ▲우수(90점 이상) ▲양호(80~89점) ▲보통(70~79점) ▲미흡(60~69점) ▲저조(60점 미만) 등으로 등급을 부여하고 있다. 은행들은 2021년 미스터리 쇼핑에서 0.5점 차로 저조 등급을 겨우 면한 것이다.

그래픽=손민균

은행권은 금융소비자보호법이 2021년 3월 시행되며 미스터리 쇼핑의 점수를 1년 만에 20점가량 올렸다. 하지만 여전히 미흡에 그친 점수여서 은행의 불완전판매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직전 2020년 미스터리 쇼핑에서 은행권이 받은 점수는 40.7점이다. 이는 은행이 상품 판매 시 설명 의무나 적합성의 원칙 등을 제대로 지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기도 하다.

현재 문제가 되는 홍콩H지수 연계 ELS는 은행이 미스터리 쇼핑에서 미흡했다고 평가받은 2021년 판매분이다. ELS는 개별 주식·지수가 일정 구간 안에 머무르면 일정 수익을 지급하는 파생상품으로 만기는 통상 1~3년이다. 특히 손실 발생의 기준점이 되는 '원금 손실 발생 구간(녹인·knock-in)' 밑으로 떨어지면 원금 손실이 날 수 있다.

홍콩H지수는 2021년 2월 19일 1만2106.77로 고점을 찍고 줄곧 하락해 현재 6000선마저 붕괴됐다. 2021년 상반기 홍콩H지수 연계 ELS에 투자했다면 지수가 최고 수준일 때 들어가 역사상 최저점까지 떨어진 터라 만기가 돌아오는 내년이 되면 손실을 입을 것으로 확실시된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 등 국내 5대 은행에서 판매한 홍콩H지수 연계 ELS 중 내년 상반기 만기가 돌아오는 판매 잔액은 총 8조4100억원 규모다. 상품 구조와 현재 주가 수준을 감안한다면 3조~4조원대 원금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우려된다.

홍콩H지수 연계 ELS 투자자들도 당시 은행의 권유로 상품을 가입했는데 그 과정에서 불완전판매 요인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투자자 A씨는 "초고위험상품이라고 적혀있지만, 안전하고 손해본 적 없다고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손해볼 일 없다고 했다"며 "약 10여분 만에 가입 절차가 끝났는데 이게 불완전판매가 아니면 무엇이겠느냐"라고 했다. 또 다른 피해자 B씨는 "좋은 상품이라 자기도 가입했으니 안심하라며 가입을 권유해서 투자했는데, 오히려 최근에는 조기상환하고 다른 상품으로 갈아타라는 전화까지 받았다"고 토로했다.

일러스트=정다운

고령의 부모가 은행원에게 속아 초고위험 상품에 가입했다는 주장도 있다. C씨는 "은행 예·적금만 하시던 72세 어머니께서 은행 직원에게 홍콩H지수 연계 ELS를 안전한 상품이라고 속아 가입했다"며 "투자 성향을 맞추기 위해 은행원은 상품 설명 등을 따라 읽으라고 시켰다. '늦게 오면 다 팔려서 가입 못 한다'며 투자를 부추긴 점도 분통이 터진다"고 했다.

투자자들은 손실이 확정되기 전 금감원에 불완전판매 관련 민원을 넣고 있으며, 손실이 확정된 후에는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투자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사실로 드러난다면, 은행권은 불완전판매 이슈를 피해갈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은행권 관계자는 "홍콩H지수 연계 ELS 사태를 보니 대리인을 통해 가입한 사례, 비보장형 ELS는 초고위험상품에 속해 고령층 등에 대해서는 투자 권유를 할 수 없는데도 이를 권유한 사례 등이 다수 나오고 있다"며 "그렇게 되면 은행권이 사모펀드 사태처럼 불완전판매 이슈를 피해갈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뉴스1

이복현 금감원장 역시 홍콩H지수 연계 ELS의 불완전판매 가능성을 살펴보겠다고 밝혔다. 이 원장은 이날 은행들이 ELS 판매 과정에서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피해 예방 조치를 취했다고 밝힌 데 대해 "일부 은행에서 묻기도 전에 ELS와 관련해 소비자 피해 예방 조치를 했다고 말하고 있다"며 "저희에겐 소비자 피해 예방 조치를 취했다기보단 본인들 면피 조치를 했다고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소비자가 충분히 상품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게 적합성 원칙의 본질적인 내용"이라며 "고위험 고난도 상품을 은행 창구에서 특정 시기에 몰려서 판매됐다는 것만으로도 적합성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의구심을 품어볼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