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7월 25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웹엑스 콘퍼런스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조선DB
"블록체인은 인터넷 문명을 혁신하고 사회 변화를 이끌 기술이다. 일본 정부는 웹3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다."

지난 7월 25일 일본 도쿄의 종합 전시장 도쿄국제포럼에서 블록체인 콘퍼런스인 웹X 2023이 개최됐다. 이 자리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영상 축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지난 2년간 산업 보호에 힘썼고, 올해는 웹3 토큰 활용과 콘텐츠 산업 활성화 등을 담은 정책 방침을 세웠다"고 설명했다.

웹X는 일본에서 가장 큰 가상자산·블록체인 관련 행사다. 정부 수반인 기시다 총리가 국가 주도가 아닌 민간 행사에서 직접 축사를 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를 두고 가상자산 시장 관계자들은 일본 정부가 가상자산 시장 육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 장면이라고 평가했다.

일본이 최근 가상자산 시장의 새로운 중심지 중 한 곳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때 가상자산 강국으로 꼽혔던 한국이 정부 규제와 투자자 감소로 쇠퇴하는 사이 일본이 정부가 주도해 여러 지원책을 가동하고 규제를 완화하며 부상 중이다. 바이낸스 등 글로벌 가상자산 거래소들은 물론 국내 게임사와 블록체인 업체 등도 최근 일본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 웹3 강국 꿈꾸는 日

지난 2021년 10월 출범한 일본의 기시다 내각은 '새로운 자본주의'를 내세워 인재와 과학 기술, 스타트업, 환경, 디지털 전환 등 5개 분야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 왔다. 이 가운데 웹3를 스타트업과 디지털 전환의 핵심 축으로 삼아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웹3는 인터넷을 활용해 데이터 유통 구조를 혁신하는 개념을 뜻한다. 기존 웹2에서는 유튜브나 페이스북 등 대형 플랫폼이 거래 중개자로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렸다면, 웹3는 다양한 기기와 사람, 서비스 간 호환을 가능하게 해 데이터 소유와 관리 권한을 개인이 갖도록 하는 점이 특징이다. 블록체인과 대체불가토큰(NFT), 메타버스 등이 웹3의 핵심적인 기술에 포함된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해 7월 웹3 전담 사무처를 신설했다. 올해 4월에는 NFT를 포함한 웹3 산업 전반에 대한 규제와 정책 제안을 담은 '웹3 백서'를 승인했다. 특히 이 백서는 가상자산 소득세 세율을 기존 55%에서 20%로 낮춰 일본 기업과 국민의 가상자산 투자를 활성화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가상자산 관련 법안에 대한 정비도 신속하게 진행됐다. 일본 의회는 지난해 스테이블코인(달러화 등 기존 화폐에 가치가 고정되는 가상화폐)의 발행과 유통 확대, 자금 세탁 방지 강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자금결제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올해 6월부터 일본의 은행, 신탁회사 등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이 가능해졌다.

국내 웹3 컨설팅 업체인 디스프레드가 일본 웹3 콘퍼런스 웹엑스(WebX) 현장에 마련한 부스. /디스프레드 제공

◇ 日 뛰어드는 가상자산 기업들…韓 게임사도 진출 모색

전문가들은 정부 지원과 투자를 통해 일본 가상자산 시장의 규모가 몇 년 안에 큰 폭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한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인 스태티스타는 지난해 54억엔(487억원) 수준이었던 일본 NFT 시장 규모가 오는 2028년에는 20배 넘게 성장한 1142억엔(약 1조3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측하기도 했다.

가상자산 시장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고, 정부 차원의 투자 활성화 노력도 이어지면서 여러 글로벌 가상자산 업체들도 일본 진출에 뛰어들고 있다.

세계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인 바이낸스는 지난달 일본 법인 바이낸스 재팬을 출범시켰다. 바이낸스는 지난 2018년 일본 진출을 시도했지만, 당시에는 일본 금융 당국의 규제에 막혀 철수한 바 있다. 그러나 기시다 정부 출범에 따라 일본에서 정식으로 가상자산 사업자 승인을 받은 것이다. 현재 바이낸스 재팬에는 약 40개의 코인이 상장돼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국내 가상자산 기업들 역시 일본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특히 P2E(Play to Earn·게임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 게임을 포함, 가상자산과 블록체인 기술의 활용 비중이 큰 게임사들이 일본 진출과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상황이다.

컴투스의 블록체인 메인넷 엑스플라는 일본 블록체인 업체인 오아시스와 전략적 협력 관계를 맺고 현지 블록체인 게임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넷마블의 자회사인 마브렉스는 올 초 일본 블록체인 게임 커뮤니티인 YGG 재팬에 투자했고, 지난 7월에는 자체 발행 코인 MBX를 일본에서 상장과 거래가 가능한 '화이트리스트'에 올리는 데 성공했다.

◇ 국내 가상자산 규제는 여전히 걸음마

일본이 가상자산과 웹3 분야에서 치고 나가자, 국내에서도 정부와 정치권이 시장 육성과 규제 완화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 늘고 있다. 시장 관계자들은 특히 금융 당국이 해외 가상자산 사업자에 대한 문턱을 낮춰 경쟁을 활성화하고, 가상자산 시장을 포괄하는 법안을 시급히 정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현재 국내 가상자산 시장은 1위 거래 플랫폼인 업비트가 독점에 가까운 지위를 갖고 있다. 업비트의 시장 점유율은 90%를 넘겼고, 2위 사업자인 빗썸은 한 자릿수에 그치고 있다. 코인원과 코빗, 고팍스 등 나머지 원화 마켓 거래소는 1%대의 점유율을 유지하기에도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다.

올해 초 바이낸스는 고팍스의 지분을 인수하며 국내 진출을 모색했지만, 지금껏 금융 당국으로부터 사업자 승인을 받지 못했다. 규제에 막혀 시간을 낭비한 바이낸스는 결국 일본으로 눈을 돌렸고, 최근 상장 코인 수를 빠르게 늘리며 일본 가상자산 시장의 '메기'로 자리를 잡고 있다.

가상자산 시장 관련 법안을 만드는 일도 이제야 첫발을 뗀 수준에 머물러 있다. 투자자 보호에 초점을 맞춘 첫 가상자산 관련 법인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법'이 지난 6월 국회에서 통과됐지만, 가상자산의 발행과 상장, 공시 의무 등 사업자에 대한 포괄적 관리와 규제 방안을 담은 법안은 아직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국회는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법도 오랜 시간을 끌다 지난 5월 김남국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코인 대량 보유 파문이 터지고 나서야 부랴부랴 통과시켰다.

가상자산업계 한 관계자는 "한국이 가상자산의 제도 정비에 시간을 끄는 사이 일본은 정부와 정치권이 손잡고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케이팝(K-POP)과 드라마 등 문화 콘텐츠에서 일본을 앞서는 경쟁력을 갖췄다"며 "신속한 법안 도입과 정부의 지원, 규제 완화가 뒷받침된다면 웹3 시대 주도권을 되찾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