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한때 ‘김치 프리미엄’으로 유명했다. 뜨거운 코인 투자 열기에 한국의 코인 시세는 다른 나라보다 높게 형성됐다. 한국 코인 거래소 업비트는 거래액 기준 세계 1위를 달렸다. 하지만 비트코인 가격이 낮아지면서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관심도 차갑게 식었다.
박종백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의 활동이 도드라져 보이는 것도 이 대목이다. 그는 블록체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이 줄고 ’크립토윈터(암호자산 시장의 겨울)’가 찾아와도 각종 세미나에서 블록체인 동향을 전하고 블록체인 기업을 자문하는 최전선에 있다.
최근엔 ‘크립토 사피엔스(Crypto Sapiens)와 변화하는 세상의 질서’라는 책도 내놓았다. 스테이블 코인(stable coin) 테라 블록체인의 붕괴와 미국 암호화폐 거래소 FTX의 파산 등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데도 그는 “세상은 변하고 있다. ‘크립토(crypto·암호자산) 문해력’을 길러라”고 말한다. 그가 크립토의 미래에 대해 이토록 확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은 일문일답.
- 블록체인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2007년 우연한 기회에 오픈소스 소프트 웨어를 공부하게 됐다.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어렵게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무료로 세상에 공개한다니. 그후 10여년간 유럽FSFE(Free Software Foundations Europe)의 법률 전문가 워크숍에 참가하고 국내에서 오픈소스법센터를 설립해 콘퍼런스를 열었다. 2010년대 중반, 오픈소스의 대표격인 ‘리눅스’와 ‘안드로이드’가 급격히 확산하는 것을 목도했다.
2016년엔 블록체인과 비트코인을 알게 됐다. ‘경제적 가치를 만들고 거래하는 인터넷’이 크게 확장할 것이라는 직감하고 블록체인 세계에 빨려들었다. 빗썸의 요청으로 가상자산업권법 세미나에서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5년간 기고, 세미나 발표와 토론을 이어갔다. 돌이켜 보면, 40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를 만난 것이 50대에 블록체인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 법조계 인물들은 대개 보수적인데.
“나도 정답을 찾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오픈소스와 블록체인·암호화폐를 만나고 질문하는 사람이 됐다. 오픈소스가 자본주의 경제의 재산권 체계와 인센티브 시스템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해주었다. 블록체인과 암호자산은 사회 발전을 중앙화라는 고도화, 효율화 관점에서만 바라보던 시각을 밑바닥부터 뒤흔들었다. 오픈소스와 블록체인을 알고 난 뒤 내가 사회와 제도를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다.”
- 2017년 비트코인, 이더리움과 각종 잡(雜) 코인 가격이 급등할 때,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 파동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았다.
“‘닥터 둠’으로 유명한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도 ‘탈중앙화’를 평가절하하더라. 블록체인 생태계가 주는 근본적인 가치까지 무시한 균형감을 잃은 시각이라고 본다. 튤립은 거품이 꺼지고 ‘관상용 꽃’으로 역할이 끝났다. 토큰은 다채로운 용도 발굴과 제도화 논의로 이어졌다.
블록체인 생태계는 전 세계 경제와 사회에 큰 변화, 새 질서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가상자산공개(ICO)부터 디파이(DeFi·탈중앙 금융) 플랫폼 구조, 토큰증권(ST·Security Token) 샌드박스 지정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프로젝트에 법률 자문을 하면서 내린 결론이다. 토큰화 자체가 인간 본성·욕망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자산이 토큰화하고, 토큰이 자본화하고, 토큰 거래가 글로벌화하는 ‘크립토 사피엔스’ 세상은 예정된 미래다.”
- ‘테라’ 블록체인은 약 60조원이 사흘 만에 먼지가 됐다. 미국 거래소 FTX는 부실이 알려지고 일주일 만에 파산했다. 이 같은 사건·사고가 기술의 한계와 중앙 기관이 왜 필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중앙화’를 얼마나 정교하고 치밀하게 만드느냐는 문명의 발전 척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중앙화의 배신’ 사례도 수없이 많다.
우리나라 큰 은행에서도 몇백억원씩 횡령 사건이 터진다. 아무리 큰 은행이더라도 은행의 원장은 하나이고 그 원장은 특정 부서의 담당자 한두 명이 맡기 때문이다. 블록체인 방식에서는 이런 일은 있을 수없다.
사고와 범법 행위가 있다는 이유로 블록체인이 가지는 근본적인 가치까지 무시해서는 안 된다. 주식회사도 지금의 형태를 갖추는 데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공정거래법상 대기업 집단의 동일인(총수)을 판단하는 기준 등 교묘한 탈세나 비법 행위를 막기 위해 회사법도 추가로 만들어지고 있다.”
- 테라·루나 사태의 책임자들이 미국과 한국에서 증권 사기로 재판을 받는 중으로 알려졌다. 쟁점을 무엇으로 보나.
“각 재판부는 테라·루나 자체가 증권이냐 아니냐도 판단하겠지만, 테라·루나를 파는 과정에서 투자자한테 수익에 대한 어떤 기대를 약속했느냐도 유심히 살펴볼 것이다. 테라·루나가 진짜 알고리즘만으로 작동했는 지, 실제로는 누군가가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거나 통제했는지에 따라 판결도 달라진다. 테라·루나의 몰락은 알고리즘 기반의 스테이블 코인을 구현하기 쉽지 않다는 교훈을 남겼지만, 암호자산 제도화를 위한 각종 규정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 최근 주목할 만한 사례가 있나.
“지난 2월 독일에서 세 번째로 큰 상장 기업인 지멘스가 블록체인 기반으로 채권 (6000만유로·약 853억원)을 발행했다. 독일은 이미 2021년 6월 전자증권법을 발효, 중개 기관 없이 블록체인 기반으로 채권을 발행할 수 있는 나라다. 8월에는 페이팔이 스테이블 코인을 출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세계 4억 명 이상의 사용자를 보유한 결제 회사가 코인 세계에 등판한 것이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도 스테이블 코인 감독 체계를 마련한다고 한다.”
- 현 윤석열 정부의 디지털 자산에 관한 법제도화 속도는 더디다.
“해외에서 잘 만든 법 조항을 몇 개 가져와 ‘레고 블록’처럼 조립하려고 하면, 법을 만들 수없다. 향후 수백 조 원 이상 자산 체계의 근간으로 활용하는 법 체계를 만들려면, 민사 법·형사법·자본시장법 등을 모두 아우르는 노력과 이해가 필요하다. 지난 5월 유럽연합 (EU)이 세계 최초의 가상자산 관련 단독 법안 ‘미카(MiCA)’를 제정했다. EU처럼 포괄적인 입법이 필요하다고 본다.”
- 오픈소스 사례를 비춰볼 때, 토큰이 대중적으로 확산하는 시기를 예측할 수 있을까.
“일반 사람은 아직도 오픈소스를 잘 모른다. 기업 커뮤니티 중심으로 확산됐기 때문이다. 오픈소스와 달리 토큰은 20%의 사람만 써도 폭발적으로 확산될 것으로 본다. 내 자산과 내 신분증이 연결된 기록이기 때문이다.”
- 대화형 인공지능(AI) ‘챗GPT’를 만든 오픈 AI 창업자 샘 올트먼은 블록체인 프로젝트인 ‘월드코인’에도 투자해 화제를 모았다. AI와 블록체인의 어떤 연결고리가 있나.
“AI가 무엇이든 생성하는 시대에 ‘진짜 나’ 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블록체인의 원본 증명 기술이 필요하다. 월드코인이 블록체인을 이용해 해결하겠다고 한 게 ‘인격 증명(Proof of Personhood)’이다. AI와 블록체인은 보완 관계라고 생각한다.”
- 아들도 블록체인 업계에서 일한다고 들었다.
“엔지니어인데, 블록체인 회사를 전문적으로 육성하는 회사로 최근 이직했다. 토큰 설계 작업을 재미있게 하고 있다. 이번에 ‘크립토 사피엔스와 변화하는 세상의 질서’를 쓸 때 아들이 기술에 관해 조언을 많이 줬다.”
Keyword 크립토 사피엔스(Crypto Sapiens)
암호자산(크립토) 기반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특질의 사피엔스(인류). 크립토 사피엔스 시대엔 오랫동안 인류와 일상을 같이 해 온 지갑과 종이 문명의 산물들이 사라지고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중앙은행 발행 디지털 화폐), 분산신원확인(DID), 토큰을 보관하는 전자지갑이 중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