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삼성생명, 한화생명, 교보생명, 현대해상, DB손해보험 사옥 전경./각 사 제공

채권 시장에서 큰손 역할을 하는 보험사들이 올해 들어 채권을 2조원 넘게 순매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2분기에만 보험사들이 2조원 규모의 자본성증권 콜옵션(조기상환권) 만기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현금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0월 레고랜드 사태 등의 영향으로 채권 시장 불안이 고조되자 금융 당국이 보험업계에 채권 매도를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금리 급등과 채권 시장 불안으로 팔지 못했던 채권을 팔아 차익 실현을 하려는 영향도 있다.

24일 금융권에 따르면 한화생명, DGB생명, KDB생명, 롯데손보, 신한라이프 등이 오는 4~6월 앞서 발행한 신종자본증권 및 후순위채권 콜 시점이 도래한다. 발행액 규모는 한화생명이 10억달러(약 1조3123억원)로 가장 크고, 발행금리는 7.3%를 제시했던 KDB생명이 가장 높다.

앞서 보험사들이 자본 확충을 위해 발행한 신종자본증권, 후순위채 등은 '자본'으로 인정되지만 결국 갚아야 할 빚이다. 만기가 가까워지면 콜옵션 실시(조기 상환)와 빚을 갚기 위해 채권을 다시 발행하는 차환 발행, 콜옵션 미행사 등의 갈래길에 놓인다.

이런 상황에서 보험사들이 보유했던 채권을 내다팔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보험사들은 올해 들어 지난 20일 기준 채권 2조2376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전년 같은 기간에는 채권 10조8138억원어치를 순매수했다. 보험사의 채권 거래 추이를 보면 이달 1일부터 지난 20일까지 보험사들이 국채, 회사채 등 보유 채권 총 7조5573억원어치를 매도하고, 4조224억원어치를 매수했다. 지난달 보험사들은 1조8859억원어치 채권을 순매수했는데, 이달 들어 매수보다 매도 규모가 커지며 순매도로 돌아선 것이다. 20일 기준 현재까지 이달 보험업계는 채권 6317억원 규모를 순매도했다.

금리 변동 등 시장 불안을 방어하기 위한 차익 실현 및 자산 포트폴리오 재조정에 나선 것이라는 게 보험업계의 얘기인데, 콜옵션을 앞두고 채권 매도 등을 통해 유동성 확보에 나선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신종자본증권은 통상 만기가 30년이지만 5년 경과 후 발행사가 콜옵션을 행사해 조기 상환하거나 연장할 수 있다. 콜옵션 미행사도 선택지 중 하나이긴 하지만 시장에서는 영구채인 신종자본증권은 콜옵션을 행사하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있다.

그래픽=손민균

한화생명은 오는 4월 10억달러 규모의 해외 신종자본증권에 대한 콜옵션을 행사할 방침이다. 지난 2018년 4월 발행한 증권이 만기에 이른 것으로, 회사 측은 이 증권 전량을 해외 외화자산으로 운용해왔는데, 이를 현금화해 상환 재원으로 사용한다는 계획이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채권 매도 거래는 보험사에서 가장 많이 하는 투자 거래 유형이다"라며 "기본 전략으로 수익성을 담보할 수 있는 채권을 매입한다거나 유동성 확보 차원에서 채권을 매도한다거나 듀레이션(원금 회수 기간) 관리 차원에서 교체 매매를 시행하는 등의 형태다"라고 설명했다.

업계는 실리콘밸리은행(SVB)사태 이후 안갯속인 금리 향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앞서 흥국생명이 콜옵션 행사를 연기하려 했던 이유도 금리가 치솟아 차환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기존 신종자본증권을 상환할 경우, 지급여력비율이 크게 하락할 수 있다는 우려 탓이었다.

금리가 내리면 신종자본증권 발행 등을 통한 자금조달 숨통이 다소 트일 수 있으나, 장기채권 비중이 큰 보험사의 경우 자본 비율은 줄어들 수 있어서다. 반대로 금리가 오르면 자금조달 부담이 가중될 수 있다. 금리가 오르면 보험사들의 차환 발행이 어려워지는 데다, 빚을 갚기 위해 다시 빚을 내는 것이라 차환을 택하면 보험사의 건전성이 악화할 수 있다.

금리가 내리면 장기 채권 비중이 큰 보험사는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생명보험사 한 관계자는 "금리가 내리면 자본 조달 면에선 득(得)이 될 수 있으나 부채에 대한 할인율도 줄어들기 때문에 실(失)이 되는 면도 있다"면서 "회사별 자산 구성에 따라 금리 변동 영향도 다르다"고 말했다.

정태준 유안타증권 국제재무분석가(CFA)는 "미국 SVB 파산 여파로 경기침체 우려가 확산돼 장기 시장금리가 하락하면서 장기채권 비중이 큰 생명보험이 타격을 입었다"면서 "금리 하락이 본격화되면 자본 비율이 상당 부분 하락하는 것은 불가피할 전망이다"라고 말했다.

한국기업평가 금융실 관계자는 "지난해 하반기에 비하면 보험사의 자금 조달 여건이 안정화했으나, 시장의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큰 상황이라 조기 상환과 신종자본증권 발행 등이 원활하게 이뤄지는지 계속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