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태를 계기로 국내에서도 다른 선진국에 비해 지나치게 낮은 은행 예금보호 한도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SVB는 고객이 예치한 돈을 주로 미국 국채에 투자하다 큰 손실을 보았고, 불안감을 느낀 고객의 예금 인출이 몰리면서 결국 지난 10일(현지시각) 파산을 맞았다. 미국은 예금보호 한도가 25만달러(약 3억3000만원)에 이르지만, SVB는 스타트업 등 기업을 주로 상대해 한도를 초과한 예금이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 韓 예금보호 한도, 2001년 이후 5000만원
15일 금융권에 따르면 한국의 예금보호 한도는 지난 2001년 2000만원에서 5000만원으로 상향된 이후 23년째 변함 없이 유지되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SVB 파산 사태가 벌어지기 전부터 정치권과 금융 시장에서는 오랜 기간 물가 상승과 경제 규모, 소득 수준 변화를 고려해 한도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돼 왔다.
유동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2020년 말 기준 미국 달러화로 환산한 한국의 예금보호 한도는 4만2373달러로 주요 7개국 평균 한도(12만4023달러)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주요 7개국 가운데 미국이 25만달러의 예금을 보호해 한도액이 가장 높다.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영국 등 유럽 주요 선진국들도 10만달러 이상의 예금을 보호하고 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 대비 예금보호 수준도 한국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크게 낮은 수준이다. 미국의 경우 1인당 GDP 대비 예금보호 한도 배율은 3.95배로 역시 주요 7개국 가운데 가장 높다. 캐나다를 비롯한 다른 선진국도 GDP 대비 2배 이상의 예금을 보호한다. 반면 한국은 국민 한 사람당 GDP에 비해 고작 1.34배 수준의 예금을 보호할 뿐이다.
◇ 금융 당국·정치권 요구에도 은행권 '난색'
지난해 2월 고승범 당시 금융위원장은 "경제 규모가 크게 늘었고 금융자산 보유도 확대돼 예금보호 한도를 확대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고 말했고, 김태현 당시 예금보험공사 사장도 "5000만원으로 정해진 한도액을 계속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상황이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정치권에서도 3년째 예금보호 한도를 증액하자는 시도가 되풀이됐다. 조경태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2020년 예금보호 한도를 1억원으로 높이자는 내용의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해 좌절됐다. 지난 2월에는 신영대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역시 1억원으로 한도를 높이는 내용의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상태다.
그러나 정치권 등의 요구에도 은행은 예금보호 한도 상향에 난색을 보인다. 예금보호를 위한 재원은 각 은행과 저축은행이 예금보험공사에 지불하는 보험료로 조성되는데, 한도가 상향되면 보험료율 오를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일각에서는 한도가 상향될 경우 저축은행 등 2금융권의 자금 운용 부담이 커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예금보호 한도가 1억원 수준으로 오르면 많은 개인 고객이 더 많은 이자를 주는 2금융권 예금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큰데, 저축은행은 수익 구조가 예대마진(예금과 대출의 금리 차) 대신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에 쏠려 있기 때문에 넘치는 자금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SVB 역시 코로나19 사태 당시 스타트업에서 많은 예금이 몰렸지만,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결국 안전자산이라 믿었던 미국 국채에 투자했다가 뱅크런을 겪고 파산에 이르렀다"며 "섣부른 예금보호 한도는 부작용도 상당한 만큼 보다 신중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