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과 시그니처은행의 파산으로 글로벌 금융 시장의 혼란이 커지고 있지만, 국내 금융 당국 내부에서는 오히려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미국이 이번 사태로 기준금리 인상 속도를 조절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은행들의 대출금리를 낮추겠다는 현 정책 기조를 유지하는데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다는 이유에서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는 최근 여러 차례에 걸쳐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적극적으로 기준금리를 인상하겠다고 공언해 왔다. 금융 시장에서도 이달 연준이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올리는 '빅스텝'을 단행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은행들의 갑작스러운 연쇄 도산으로 미국 안팎에서 연준에 대한 비판이 늘면서 공격적인 금리 인상을 고집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상황이 됐다.
◇ "연준, 3월 빅스텝 나설 가능성 제로(0)"
금융 시장에서는 미국 은행들의 잇따른 파산으로 연준이 이달 빅스텝을 단행할 가능성이 크게 줄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현지시각 12일 오후 10시 22분 기준으로 미국 시카소상품거래소(CME)의 기준금리 예측 프로그램인 페드워치에서는 오는 21일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연준이 0.25%포인트 올리는 '베이비스텝'을 결정할 확률이 95.2%, 금리 동결 확률은 4.8%로 각각 나타났다.
빅스텝을 단행할 확률은 0%였다. 사실상 이번 사태로 연준이 빅스텝에 나설 가능성이 사라졌다고 분석한 것이다. 페드워치는 불과 지난주까지 빅스텝 확률을 80% 이상으로 예측했지만, SVB와 시그니처은행의 연쇄 파산을 거치면서 전망을 뒤집었다.
연준이 이달 FOMC에서 당초 결정과 달리 기준금리를 소폭 올리거나 동결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는 이번 SVB 파산 사태가 무리한 금리 인상 때문이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스타트업을 주요 고객으로 하는 SVB는 코로나 사태 당시 '돈 잔치'를 벌였던 기업들의 대출 수요가 줄어들자 예금 자산을 주로 미국 국채에 투자했다. 그러나 이후 기준금리가 가파르게 인상되면서 반대로 채권 가격은 급락했다. 최근 돈줄이 마른 기업들이 예금을 찾으려 했지만, SVB는 투자 실패로 지급을 하기 어려웠고 결국 뱅크런이 닥치면서 파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상원 국제금융센터 글로벌 은행부장은 지난 11일 발간한 보고서에서 "SVB 파산 사태가 미국의 금융시스템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은 제한적이다"라면서도 "중소 은행들이나 벤처캐피탈(VC) 산업, 나아가 연준의 통화정책 방향 등에는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 대출금리 인하 압박했던 금융 당국 '숨통'
금융 당국에서는 SVB 사태가 현 정책 기조를 유지하는데 유리한 측면이 있다는 입장이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 당국 관계자는 "국내 은행은 SVB와 사업 모델이 달라 영향이 거의 없다"며 "오히려 이번 사태가 연준에 금리 인상을 제한하는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큰 점은 긍정적이다"라고 말했다.
금융 당국은 올해 들어 계속 은행권에 국민과의 상생을 위해 대출금리를 인하하라고 요구해 왔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9일 서울 여의도 KB국민은행 본점을 찾아 관계자들에게 "고금리로 차주들의 이자 부담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은행들도 상생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 원장의 방문을 앞두고 KB국민은행은 신용대출 금리를 최대 0.5%포인트, 전세자금대출과 주택담보대출 금리는 0.3%포인트 각각 인하하겠다고 발표했다.
대출상품의 금리 인하를 요구해 온 금융 당국 입장에서 미국 연준의 기준금리 인상 예고는 상당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은행을 직접 압박해 대출금리를 소폭 떨어뜨려도 미국이 큰 폭으로 금리를 올릴 경우 정책의 약발이 단기간에 소멸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만약 미국이 빅스텝을 단행하면 지난달 금리를 3.50% 동결했던 한국은행마저 다음 달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올려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 경우 시중은행들의 대출금리 역시 비슷한 수준으로 다시 인상될 수밖에 없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예상치 못한 미국 은행의 연쇄 파산은 오히려 우리 금융 당국에 숨통을 터준 셈이 됐다"며 "이달에 연준이 기준금리를 소폭 인상하는데 그칠 경우 금융 당국이 은행들의 대출금리 인상을 억제하는데 부담이 상당히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