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을 아시아 시장의 차세대 중심지로 키우겠다는 국내 은행들의 전략이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최근 베트남의 권력 수뇌부가 친중(親中) 인사들로 채워지면서 베트남의 경제 개혁·개방 정책이 변화할 가능성이 한층 커졌기 때문이다.
국내 시중은행들은 중국 다음의 해외 사업 요충지로 베트남에 진출해 많은 투자를 해 왔다. 특히 지난 2017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이후 중국에서 국내 기업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자 베트남에 대한 투자 규모는 더욱 늘었고 KB국민은행과 IBK기업은행 등 후발주자들도 베트남 진출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최근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심화된 상황에서 친중 성향이 강한 베트남 권력 수뇌부가 개방 중심의 경제 정책을 바꾸려고 할 경우 국내 은행의 글로벌 사업에 새로운 위험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정부와 금융 시장 일각에서는 특정 국가에 쏠린 해외 진출 전략을 벗어나 태국, 인도네시아 등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로 거점을 다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 베트남 권력 서열 1~4위 친중 인사로 재편
2일(현지시각)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베트남 국회는 이날 임시회의를 개최하고 98.3%의 찬성률로 보반트엉 공산당 상임서기를 신임 국가주석으로 선출했다. 국가주석은 베트남의 권력 서열 2위에 해당된다. 보반트엉 주석은 베트남의 대표적 친중 인사로 꼽히는 인물이다.
이에 따라 베트남의 권력 서열 1~4위는 모두 친중파로 채워지게 됐다. 앞서 지난 1월 친미(親美) 인사로 꼽혔던 응우옌쑤언푹 전 주석은 뇌물 스캔들이 불거지면서 중도 사임했다. 그와 함께 친미 성향으로 분류되는 부총리와 장관들도 부패 의혹에 휘말리며 퇴임하거나, 구속됐다. 이를 두고 일부 외신들은 친미 인사들이 베트남의 권력 투쟁에서 패해 사실상 숙청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베트남은 경제 성장을 위해 지난 1986년 '도이모이(Doi Moi·새로운 변화)' 정책을 도입했다. 이를 통해 권력을 공산당 체제중심파와 경제개방파로 분산해 실용주의 노선을 펴 왔다. 그러나 베트남의 권력 구도가 친중 일색으로 바뀜에 따라 30여년간 지속돼 온 베트남의 경제 개방 정책도 변화의 갈림길에 서게 됐다.
◇ 신한·우리, 베트남 적극 공략…KB·기업은행도 진출 추진
베트남의 경제 개방으로 국내 기업들과 함께 시중은행들도 2000년대 중반 이후 베트남에 활발하게 진출해 왔다. 특히 사드 배치와 미·중 갈등의 여파로 중국에서의 사업이 차질을 빚자, 은행들은 베트남 투자를 확대하거나 진출을 적극 모색하는 상황이다.
베트남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로를 개척한 곳은 신한은행이다. 신한은행은 지난 2009년 현지 지점을 법인으로 전환해 신한베트남은행을 설립했다. 이후 2011년 신한비나은행, 2017년 호주계 ANZ은행 소매영업 부문을 각각 인수하며 덩치를 불렸고, 베트남에 젊은 인구가 많다는 점을 공략해 최근 디지털뱅킹 분야 투자도 확대하고 있다.
실적도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신한베트남은행은 지난해 3분기까지 1447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62.7% 증가한 수치다. 지난해 반기 기준으로 신한은행 전체 글로벌 현지 법인의 순이익 중 32%가 베트남에서 나왔다.
우리은행 역시 베트남에서 최근 실적이 눈에 띄게 개선되고 있다. 우리은행은 1997년 베트남 하노이에 첫 지점을 열었고 사드 배치 이후인 2017년 베트남우리은행 법인을 설립했다. 베트남우리은행은 현재 총 20개의 지점을 두고 있으며, 지난해 3분기 순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63.3% 급증한 274억원을 기록했다.
하나은행은 지난 2019년 1조원을 투자해 베트남투자은행(BIDV)의 지분 15%를 취득해 현재 2대 주주로 있다. 이와 별도로 베트남에서 2곳의 지점도 운영하고 있다. IBK기업은행도 지난해부터 베트남 법인 설립을 추진하고 있으며, KB기업은행도 법인 설립을 검토 중이다.
◇ 인도네시아·태국 등으로 해외 거점 분산해야
베트남의 권력 지형이 친중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정부와 금융 시장에서는 베트남으로 지나치게 쏠려 있는 국내 은행들의 해외 투자 전략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30여년을 지속해 온 도이모이 정책을 하루아침에 버리긴 어렵지만, 미·중 갈등 속에서 친중 성향의 베트남 권력 수뇌부가 과거처럼 외국 기업과 금융사에 개방적인 정책을 펴지는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베트남 법인의 규모가 가장 큰 신한은행의 경우 지난해 3분기 실적을 보면 중국을 제외하고 인도네시아, 미국 법인 등의 순이익은 베트남 법인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최근 베트남에 이어 국내 은행들의 진출이 유망한 곳으로 꼽히는 국가는 인도네시아와 태국 등이다. 이들 국가는 베트남, 캄보디아, 중국 등에 비해 정치적 리스크가 덜하고 해외 기업에 대한 개방 수준이 높다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인도네시아의 경우 2억7000만명에 이르는 인구와 풍부한 지하자원을 갖고 있는 데다, 최근 현대자동차 등 국내 기업들도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어 은행의 다음 요충지로 부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