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금융사들의 동남아시아 영토 확장 전쟁이 뜨겁다. 이들의 해외 진출 핵심 전략은 디지털 경쟁력이다. 해당 국가에 진출한 한국계 기업 위주의 영업에서 벗어나 현지 소비자를 공략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동남아시아 시장에 다양한 매물이 나오고 있다는 점은 국내 금융사들에 호재다. 국내 금융사들이 인수·합병(M&A)을 통해 신성장 동력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22년 사상 최고 실적을 냈던 KB·신한·우리·하나 등 4대 금융그룹은 해외사업에서도 순항을 이어가고 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신한금융의 주력 계열사 신한은행의 경우 해외법인 10곳의 지난해 3분기 누적 순이익이 역대 최대인 약 3091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60.3%가량 증가한 수치로, 특히 신한베트남은행에서 절반에 가까운 1447억원의 순이익을 내는 등 동남아시아 시장을 공략한 전략이 유효하게 작용했다.
우리은행도 지난해 3분기까지 전년 동기 대비 63% 늘어난 2144억원의 누적 순이익을 기록하며 역대 최고 해외법인 성적표를 받았다. 신한은행처럼 베트남·인도네시아·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수익성을 대폭 높이면서다. 베트남 법인의 순이익(413억원)은 1년 만에 2배 이상 증가했고, 캄보디아에서도 전년보다 28%가 증가한 440억원의 순이익을 거뒀다.
KB국민은행과 하나은행의 경우 전체 글로벌 실적은 뒷걸음질쳤지만, 나라별로 보면 동남아시아 법인의 약진이 눈에 띄었다. KB캄보디아은행은 전년보다 32% 증가한 109억원, 캄보디아 소액대출금융기관인 프라삭 마이크로파이낸스는 1780억원의 순이익을 각각 기록했다.
하나은행은 글로벌 실적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중국 법인이 마이너스 실적을 기록해 전체 순이익은 감소했지만, 인도네시아법인 순이익(416억원)은 전년 동기 대비 2배 가까이 늘었다.
◇ 애물단지 현지 금융사 인수해 효자로 탈바꿈… 코로나19 거치며 매물 쏟아져
이처럼 금융사들이 앞다퉈 동남아시아 시장을 공략하는 배경엔 높은 성장 잠재력이 있다. 특히 이들이 집중하는 베트남·인도네시아·캄보디아 등은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직전까지 매년 6~8%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신흥국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동남아시아 평균 연령은 30대로, 금융 수요가 큰 반면 인프라는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진출 여지와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과거 통상적인 금융사들의 해외 진출 방식은 ‘사무소→지점→법인 설립→지점 확대’의 형태였다. 공략하는 지역도 미국·일본 등 선진국으로 격차를 좁히는 데 큰 비용이 들었고, 현지화 영업 역시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 신(新) 남방정책을 계기로 금융사들은 동남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예대금리차(예금과 대출 금리 차이)로만 이익을 얻는 기존 수익구조를 다각화·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금융사가 택한 방법은 현지의 저평가된 금융사를 인수한 뒤 필요에 따라 자본을 투입해 몸집을 키우는 것이었다. 2021년까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출장길이 막혀 차질을 빚긴 했지만, 2022년 들어 다시 시동이 걸렸다. 특히 코로나19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글로벌 금융시장이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동남아시아엔 다양한 매물이 쏟아졌다. 이에 위기 속 저평가된 자산을 선제적으로 인수하려는 국내 금융사가 늘어날 전망이다.
실제로 KB국민은행은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인도네시아 자산 기준 14위인 중대형은행인 부코핀은행의 지분 67%를 추가 확보하며 최대 주주에 올랐다. 당시 KB국민은행은 부실여신 비중이 높은 부코핀을 저렴한 가격에 인수했는데, 장부가보다 70~80% 할인된 가격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예상하지 못했던 추가 부실이 발견되며 실적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부코핀은행은 KB국민은행으로 주인이 바뀌며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로부터 신용등급이 최고 등급인 ‘AAA’로 상향 조정되는 등 시장에서의 위상이 달라졌다.
신한은행의 베트남법인 또한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2017년 말 신한금융은 호주 ANZ은행의 베트남 리테일 부문을 인수하고 통합을 완료해 베트남 현지 외국계 은행 1위에 올랐다. 2018년 9월엔 인도네시아 자산운용사 아키펠라고를 인수하기도 했다.
우리금융은 2014년 소다라은행 인수를 시작으로 2014년 우리파이낸스 캄보디아 여신전문금융사, 2016년 필리핀 저축은행 웰스뱅크 등을 잇달아 인수했다. 하나금융 역시 베트남 국영상업은행인 BIDV(베트남투자개발은행)에 1조원을 투자해 3년 만에 투자금을 모두 회수하는 성과를 냈다.
◇ 인수 후 전략은 ‘디지털 전환’… 진출국의 불안한 정치·경제적 요인은 리스크
현지 기업을 인수한 금융사의 다음 전략은 디지털 전환이다. 실제로 국내 금융지주 회장들이 자주 언급하는 모범 사례가 있다. 싱가포르 최대 은행인 DBS은행으로, 디지털 역량을 활용한 해외 진출을 통해 성장 동력을 키우고 있다.
2013년 인도네시아 다나몬 은행 인수를 추진했던 DBS은행은 정부의 해외 자본 규제로 어려움을 겪자 모바일뱅크로 전략을 선회했다. 그 일환으로 인도에 디지뱅크를 설립해 비대면 통장 개설·지문 인식 쇼핑 등 차별화된 디지털화로 1년 만에 120만명의 가입자를 유치했다. 이후 2017년 인도네시아, 2020년에는 홍콩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4대 시중은행도 동남아시아 소비자 대부분이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만큼 모바일 뱅킹을 앞세워 고객을 공략하고 있다. KB국민은행은 2016년 전자결제 등이 가능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 리브캄보디아를 일찍이 선보여 이용자 12만명을 확보했다. 지난 5월엔 정보기술(IT) 전문가인 이우열 은행장을 선임하고, 차세대 IT 시스템 구축 작업을 진행하는 등 디지털 전환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신한은행도 최근 신한베트남은행을 통해 신한 쏠(SOL) 베트남 앱에서 5분 만에 대출받을 수 있는 비대면 신용대출 상품 디지털 컨슈머론을 론칭했다.
IT 업체와 손잡고 해외 시장을 뚫기도 한다. 하나은행은 2021년 6월 네이버의 일본 자회사 라인과 협업한 디지털뱅킹 서비스 ‘라인뱅크’를 인도네시아에서 선보였다. 지난해 7월엔 비대면 대출 상품을 선보이는 등 라인의 두터운 메신저 고객을 발판으로 각종 은행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우리은행은 전자지갑 충전서비스 기업, 인터넷 쇼핑몰, 편의점 등 동남아시아 유망 스타트업과 제휴해 젊은 세대를 공략하고 있다.
금융권에선 앞으로 동남아시아에서 금융사들이 디지털을 기반으로 은행을 비롯해 카드, 금융투자 등 전 업권의 시너지를 발휘할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금융시장이 포화 상태가 되면서 해외 금융사를 인수해 체질 개선을 시켜 수익을 다각화하는 게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금감원에 따르면 국내 은행은 2021년 말 기준 39개국에 204개 점포가 진출해 있다. 국가별로는 ▲베트남(19개) ▲미얀마(17개) ▲중국·인도(16개) ▲캄보디아·인도네시아(11개) 등 아시아지역 점포가 141개로 전체 69.1%를 차지한다.
다만 전문가들은 국내외 금융시장이 민감한 시기인 만큼 금융사들이 해외 점포 리스크 관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최근 코로나에 이은 고환율 문제로 동남아시아 경제가 흔들리고, 중국도 부동산 경기침체로 위기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해 11월 “해외점포의 경우 물리적 거리와 진출국의 정치·경제적 요인 등으로 리스크 관리가 취약해질 수 있다”며 “내부통제 등 운영 측면의 적정성도 함께 살피고 보완하여 해외 점포의 위기 대응 능력 강화와 내실 있는 운영에도 힘써 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