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이 최근 자산 정리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의 매각을 20여년 만에 추진한 데 이어 HMM, KDB생명, 케이조선 등 지분을 보유한 기업들과의 오랜 관계를 정리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산은은 기존 '부실기업 구조조정' 역할 대신 앞으로 새로운 산업의 마중물로서의 역할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산은은 최근 지분 매각이 가능한 출자회사를 대상으로 매각 추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실이 금융위원회로부터 받은 '금융위 산하 공공기관 혁신 계획'안에서도 산은은 대우조선해양, 금호타이어, 케이조선(舊 STX조선해양), KG스틸(舊 동부제철), KDB생명 등에 대한 지분 매각 작업을 추진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먼저 포문을 연 곳은 대우조선해양이다. 지분 55.7%를 보유한 대우조선해양의 최대주주인 산은은 지난 9월 한화그룹에 대우조선해양을 매각한다고 발표했다. 매각대금은 2조원 전후다. 현재 한화그룹은 대우조선해양의 실사를 진행하는 등 인수 작업을 진행 중이다.

KDB생명보험 역시 다시 매각 작업에 들어간다. 산은은 최근 삼일회계법인을 매각주관사로, EY한영회계법인을 회계자문사로 선정하고 이달 본격적인 매각 절차에 돌입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산은이 92.7%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KDB생명은 당초 JC파트너스가 인수할 예정이었지만, 대주주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지난 4월 매각이 불발됐다.

산은은 이미 구조조정 작업을 끝냈지만 잔여 지분을 들고 있는 기업에 대한 정리도 착수했다. 케이조선과 KG스틸 잔여 지분 잔여 지분의 매각을 연내 추진할 방침이다. 이미 케이조선의 경우 잔여지분 2.47%에 대한 매각 공고를 띄웠다.

특히 산은은 매각에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했던 HMM의 매각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산은은 최근 HMM 잠재 인수 후보군 기업 관계자들을 만나 시장 상황에 관한 의견을 나누며 매각의 최적기를 찾기 위한 시장 상황에 대해 사전 조사를 진행했다. 산은은 "HMM 매각에 앞서 시장 상황을 파악하는 수준"이라고 선을 그었지만, HMM의 매각 속도도 빨라질 수 있다는 시장의 관측이 나오고 있다. 현재 HMM은 산업은행이 20.69%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이처럼 산은이 보유 중인 출자회사 지분 매각에 속도를 내는 것은 올해 들어 예상된 부분이었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 6월 경제정책방향 브리핑을 통해 "정책금융이 민간의 역동적 혁신을 효과적으로 지원하도록 민간과의 중복을 최소화하겠다"고 밝혔다. 민간금융 영역 속 정책금융의 역할을 점진적으로 줄이고, 정책금융 성과평가·발전적 재편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강석훈 산업은행 회장이 지난 9월 26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산업은행 제공

이에 따라 시장에서는 국내 산업 재편을 담당해온 산은이 앞으로는 부실기업을 오래 보유해 정상화한 뒤 매각하는 방식 대신 시장 원리에 따라 신속히 구조조정을 하는 방식으로 선회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강석훈 산은 회장 또한 지난 9월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대주주의 책임 있는 역할, 이해당사자의 고통 분담, 지속가능한 경영정상화 방안이라는 기존 산은 구조조정 기조에 더해 신속한 매각 추진이라는 게 원칙"이라며 "매각이 가능할 때 바로 매각해야 한다"고 말하며 이 관측에 힘을 더했다.

산은이 전향적으로 자산 매각에 나서면서 산은 고유의 역할도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 부실 기업을 관리하는 대신 산업의 세대교체와 혁신을 주도하는 역할에 집중할 것으로 전망된다. 낡은 산업의 구조조정에 매달리는 대신 반도체, 디스플레이, 2차 전지 등 초격차산업과 바이오, 원자력, 전기차 등 유망 신산업에 집중적으로 지원할 것으로 보인다.

강 회장 또한 지난 9월 한국산업연합포럼(KIAF)의 포럼에서 '경제환경 변화와 산업은행의 새 역할'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통해 "시장 성숙도가 낮아 재정 투입이 필요한 영역과 성숙도가 높아 민간에서 충분히 투자가 이뤄지는 영역 사이에 일종의 금융 갭(financial gap)이 존재한다"며 "이 영역에서 정책금융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한편, 일각에서는 산은의 지분 매각 추진을 최근의 채권시장 안정화를 위한 자금 마련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산은은 채권시장 안정화를 위해 대규모의 자금을 투입하고 있으나, 산금채 등 채권 발행에는 제한이 있는 상황이어서 보유 지분 매각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