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미국 달러와 주식에 투자해왔는데, 이제 일본 엔화와 주식에 투자해보려 합니다."
2018년부터 올해까지 미국 주식과 달러에 꾸준히 투자해왔다는 40대 직장인 A씨는 최근 일본 경제 뉴스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는 "미국 달러와 주식으로 차익을 실현해보니 일본 엔화에 관심이 생겼다"면서 "언젠가는 엔화 가치도 새 국면에 들어설 것이고 본다"면서 "외화 예금 통장에 가입해 엔화를 저축해볼 계획"이라고 했다.

미국 달러화 가치가 치솟는 반면 달러화 강세 여파로 일본 엔화 가치가 추락하고 있다. 금융업계에선 '현재 엔화가 바닥에 이르렀다'고 보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럼에도 국내에서는 엔화에 투자해 향후 환차익을 노리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최근 국내 금융 시장에서는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사무라이본드(채권)' 발행이 재개됐다. 이를 두고 엔화 가치의 향방에 대한 금융사들의 예측을 엿볼 수 있는 '바로미터'라는 해석도 나온다.

지난 26일 오전 외환시장에서 장중 달러당 엔(달러화 대비 엔화 환율)은 148.177엔~148.344엔 수준에 거래됐다. 일본 금융당국이 달러를 팔고 엔화를 사들이는 시장 개입을 단행해, 150엔선까지 오르며 고조됐던 불안은 다소 진정된 분위기다.

이달 20일 달러화 대비 엔화 환율은 32년 만에 150엔을 돌파했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으로 불리는 장기 불황 초입이던 1990년 8월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엔화 가치가 떨어진 것이다.

지난 22일 오전 1시3분 146엔대에서 움직이는 엔·달러 환율이 일본 도쿄의 모니터에 비치고 있다. 일본 정부와 중앙은행은 전날 밤 뉴욕외환시장에서 달러당 151.90엔대까지 오르자 달러를 팔고 엔화를 사는 환율 개입을 시행했다. 지난달 22일 24년 만에 엔 매수 개입을 한지 한 달만의 추가 개입이 이뤄지자 엔·달러 환율은 급락해 결국 147엔대 후반에서 마감했다. /연합뉴스(日 교도통신 제공)

◇ "힘 잃은 엔화 사볼까"… 저가 매수 노리는 환테크족

현재 엔화 약세 이유는 ▲미국과 일본의 정반대 금융 통화 정책 ▲무역수지 적자 ▲일본 경제 침체 등이 꼽힌다.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거듭 올리며 강력한 긴축 정책을 펼치는 미국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저금리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2012년 12월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일본의 경제 침체를 해결하기 위해 '돈을 풀어 경기를 활성화한다'는 이른바 '아베노믹스' 정책을 통해 국채를 찍어 계속 유통했다.

미국과 일본의 금리 격차가 벌어지면서 과거 안전자산으로 여겨졌던 미국 달러와 일본 엔화의 향방이 달라지자, 엔화에 투자해보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금융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미국 달러가 떨어졌을 때 일찍이 달러를 사모았다가 올해 달러 가치가 오르면서 차익을 본 환테크 고수 중에서는 달러를 팔아 차익 실현을 한 뒤 엔화에 투자하겠다는 투자자들이 늘었다.

그런가 하면 '진작에 달러 좀 사둘걸'하는 후회감에 엔화에 관심을 두는 경향도 엿보인다. 지금 달러 투자를 하기엔 늦은 감이 있어 부담이 따르니, 대신 엔화에 투자해 차익 기회를 잡아보려는 기대 심리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단기에 환차익을 보고자 엔화에 접근하는 것은 다소 위험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홍춘욱 리치고 인베스트먼트 대표는 "저가 매수를 통해 환차익을 노리는 접근은 가능하다"면서도 "다만 전체 자산 포트폴리오의 일부로서 중장기적 관점에서 분할 매수하는 편이 안전하다"고 조언했다.

홍 대표는 "일본이 초저금리 정책에 힘입어 장기 불황을 끝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현재 주요 기업들의 실적을 보면 꽤 견조하다는 진단이 나온다"면서 "일본 경제가 30년의 불황을 끝내고 본격 성장한다면 이때는 강한 모멘텀이 생길 수 있는 잠재력이 있고, 이런 장기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1년 이후 한국 원화, 중국 위안, 일본 엔 실질실효환율(REER) 추이. /홍춘욱 리치고 인베스트먼트 대표 제공

◇ 사무라이본드 발행은 곧 '엔화 약세'에 베팅

금융권에서는 엔화가 바닥을 찍고 반등할 수 있다는 '엔화 바닥론'보다는 '엔화 약세'에 더 무게가 실리고 있다.

26일 현대캐피탈은 일본에서 200억엔 규모의 사무라이본드를 발행했다고 밝혔다. 현대캐피탈이 사무라이본드를 발행한 것은 3년 만이다. 이에 앞서 신한은행도 이달 320억엔 규모의 사무라이본드를 ESG채권으로 발행했다. 국내 시중은행이 사무라이채권을 발행한 것은 5년 만이다.

이를 두고 업계에선 여러 평가와 해석이 나왔다. 사무라이본드는 외국 정부나 기업이 일본 내 투자자를 대상으로 일본에서 발행하는 엔화 표시 채권이다.

국내 은행이 저금리 기조가 지속되고 있는 일본에서 싼값에 자금을 조달하고자 채권을 발행한 것이다. 세계적 금리 인상으로 자금 조달 여건이 팍팍해진 상황에서 자금조달이 어려워지자, 저금리 정책을 유지하는 일본 자본 시장에서 길을 찾은 셈이다.

사무라이본드 발행에는 '엔화 약세'가 지속할 것이란 판단이 깔렸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홍 대표는 "사무라이채권 발행은 곧 엔화약세에 대한 베팅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만약 엔화가 강세를 띠면 사무라이본드 등 엔화표시채권을 통해 엔화 자금을 조달했던 기업이나 금융사는 원리금 부담이 커지게 된다. 하지만 엔화 가치가 지금보다 더 떨어지면 오히려 환차익을 볼 수 있다.

신한은행이 이번에 발행한 사무라채권의 금리와 만기는 엔화 기준 0.87%(만기 2년), 0.98%(만기 3년), 1.33%(만기 5년)다. 현대캐피탈도 0~1%대의 현지 발행 금리를 달성했다. 현대캐피탈의 경우, 현지 발행 금리가 1년 6개월물 0.98%, 2년물은 1.05%, 3년물은 1.21%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이번 사무라이채권 발행으로 선제적인 외화 유동성 확보와 조달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현대캐피탈 관계자는 "한일 양국의 정치적 갈등으로 최근 3년여간 우리나라 기업의 사무라이 본드 발행이 드물었는데 현대캐피탈이 사무라이 본드 시장의 문을 다시 두드려 채권 발행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김승혁 NH선물 리서치센터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은행의 개입으로 150엔선을 방어했지만 미국과 일본의 금리 차가 여전하고 일본 정부의 완화적 스탠스가 변함없기 때문에 금융시장에서 '엔 약세' 베팅이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금융 시장에서는 미국과 일본의 금리 격차를 노리고 일본에서 낮은 금리로 엔화를 빌려 고금리 해외자산에 투자하려는 '앤 캐리' 수요가 늘어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지난달 22일 금융정책결정회의 뒤 열린 기자회견에서 임금 인상과 인플레이션 방어를 위해 저금리 기조를 지지한다고 입장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