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에 발맞춰 금융권에 여풍(女風)이 다시 불고 있다. 과거에도 우리나라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며 금융권에서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가 잇달아 나왔지만, 여성 임원 비중은 여전히 7% 수준에 머무른다. 여풍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선 근본적으로 여성 인재 풀(Pool)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조선비즈는 현장에서 활약하는 여성금융리더를 만나 금융인을 꿈꾸는 이들이 나아갈 방향을 물었다. [편집자 주]
지난달 18일 서울시 영등포구 KB국민은행 여의도전산센터에서 만난 오순영(45) KB국민은행 금융 인공지능(AI) 센터장(상무)은 IT업계를 떠나 금융사에서 일하게 된 배경을 묻자 이같이 답했다.
1977년생인 오 센터장은 서울여자대학교 컴퓨터학과를 졸업 후 2004년 한글과컴퓨터(030520)(한컴)에 입사했다. 그는 한컴에서 대표 상품인 한컴오피스의 호환성을 향상시키고, AI와 음성인식 등 신사업을 이끌었다. 2019년엔 한컴 창사 이래 29년 만에 첫 여성 최고기술책임자(CTO)가 되며 주목받았다.
KB 금융AI센터는 KB국민은행과 KB금융지주 겸직 부서로, 금융서비스와 AI 기술을 접목한 서비스 개발이 주 업무다. KB국민은행 직원들이 업무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돕는 AI 서비스를 발굴하고, KB금융그룹 AI 관련 가이드라인·정책 등 전략을 기획한다. 최근엔 고객과 직접 소통이 가능한 'AI 금융비서'를 개발했다. 다음은 오 센터장과 일문일답.
그동안 걸어왔던 길과 달리 금융업계를 선택한 배경은.
"처음 사회생활을 닷컴벤처에서 시작하고, 한컴에서 17년가량을 일하면서 다음은 어디여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빅테크·AI 스타트업 등이 아닌 금융사로 간다고 하자 주변에선 IT업계의 자유로운 환경과 다른 조직문화, 금융 관련 지식 부족 등을 꼽으며 반대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점들이 금융업계를 선택한 이유가 됐다. 자신을 불나방 같은 사람이라 생각하는데, 잘 모르는 분야에 도전하는 게 오히려 더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현재 이 선택에 대해 매우 만족한다.
자칫 자만할 수 있는 시기에 겸손하게 듣고 배울 기회가 됐고, 금융 AI 활용 분야가 무궁무진해 해볼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한다."
한 채용박람회에서 경력은 사다리가 아닌 정글짐이라고 한 발언이 인상 깊었다.
"어떤 한 가지 길을 올 곧이 가야 할 분야들도 있겠지만, 다른 산업 간의 활발한 융복합도 함께 일어나고 있다. 다른 분야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중요해진 세상이 된 것이다.
당장 내게 의미 없을 것 같은 일도 언제 쓰임이 있을지 모른다. 정상을 향해 다양한 형태로 올라갈 수 있는 정글짐이 지금 시대에 경력을 쌓아가는 데 맞는 표현이라 생각한다."
남성이 다수인 상황에서 여성으로서 어려움은 없었나.
"사실 어렵다는 생각보단 오히려 이런 상황을 장점으로 잘 활용할 수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미팅에서 여성임원이나 여성개발자가 많지 않다 보니 당시 회의에 참석하셨던 사람들에게 존재감이 컸다. 쉽게 기억할 수 있다는 건 무엇을 맡든지 더 잘해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가 됐다. 그렇기에 어떤 업무를 맡든 책임감 있게 해내려 했고, 그래야 뒤에 또 다른 여성 리더가 존재할 수 있다고 봤다."
KB에서의 AI 개발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하다.
"고객을 위한 AI 금융의 방향성은 명확하다. 고객 개인에게 최적화된, 이른바 초개인화된 금융서비스를 AI를 통해 제공하는 것이다.
AI를 사람처럼 구현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과거와 현재 데이터를 통해 개인에게 필요한 정보를 예측하고, 맞춤으로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핵심이다.
AI를 통해 사람들의 생애주기에서 필요한 부분들을 보조하고 돕는 것이 지향점이라 생각해서 'AI 은행원'이란 용어 대신 'AI 금융비서'란 단어를 쓰고 있기도 하다."
시중은행이 핀테크 업체보다 디지털 전환(DT) 면에서 뒤처진다는 인식이 있다.
"실제 금융사에서 일하게 되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접근하는 방식은 다를지라도 디지털 전환이나 새로운 기술에 대한 검토는 어느 핀테크 업체만큼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또 금융사는 업력이 오래된 만큼 가진 데이터 규모에서 경쟁력이 있고,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영업점을 통해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금융인을 꿈꾸는 이들에게 조언 부탁한다.
"흔히 새해가 되면 새로운 다이어리를 사는데, 개인적으론 새해 계획을 세우지 않은 지 10년은 된 것 같다. 대신 매일 매일 맞는 하루가 중요해졌다. 그날 해야 할 일을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히 하면서 얻는 자존감과 성취감이 일을 자신감 있게 추진하는 원동력이 됐다.
또 어떤 목표도 혼자 이룰 수 없다. 주변의 좋은 분들로부터 배우고, 또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배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멘토링 행사에서 받는 여학생들 질문의 공통점은 스스로 충분히 잘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잘하기엔 아직 실력이 부족하다는 건데, 자신에게 매우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생각하는 경향은 도전에 대한 방해가 된다. 일단 부딪쳐보면 좋겠고, 실패도 성공의 일부이며 한 번에 계획한 방향대로 가는 사람은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