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 은행들이 기존보다 만기를 5년 이상 늘린 초장기(4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 상품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금리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는 데다 가계 부채 관리 규제 강화 영향으로 은행권 가계대출이 감소하자, 은행들이 기존보다 만기를 늘리는 카드를 꺼내 들고 있는 것이다.

금리 상승 시기에 맞추어 차주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취지라는 게 은행들이 앞세운 명분인데, 일각에서는 정부 대출 규제에 따른 시장의 꼼수성 대책이란 지적도 나온다.

26일 은행권에 따르면, KB국민, 신한, 우리, NH농협 등 주요 은행이 주택담보대출(이하 주담대) 만기를 기존 최장 35년에서 40년으로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시중은행 중에서는 하나은행이 지난 21일부터 처음으로 주담대 상품 만기를 40년으로 확대 시행했다. 이에 다른 은행들도 잇따라 초장기 주담대 상품 내놓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서울 한 은행 외벽에 대출 금리 안내 현수막이 걸려있다. /뉴스1

은행들의 주담대 만기 연장은 새 정부의 총부채원리금상환제도(DSR) 대출 기조에 따른 대응책이라는 게 은행권 관계자들의 얘기다.

주담대 만기 확대 시점을 검토 중인 A은행 관계자는 “향후 상황을 봐야겠지만, 새 정부가 현행 주택담보인정비율(LTV) 규제는 완화해주는 반면 차주별 DSR 규제는 유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 반영됐다”고 말했다. 그는 “LTV규제를 풀더라도 차주별 대출 한도가 정해져 있는 한 대출 규제 완화 효과가 떨어진다”면서 “대출 만기를 연장해 규제 부담을 덜어보려는 것”이라고 했다.

DSR 규제는 연간 원리금 상환액을 연간소득으로 나눠 가계 대출을 관리하는 제도다. 주담대, 신용대출, 마이너스통장, 자동차 할부금, 카드론 등 모든 대출이 소득의 일정 비율 이상을 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것이다.

현재 규제지역 내 6억원이 넘는 주택을 구매하는 경우 총대출 금액이 2억원 이상인 차주는 연소득의 40% 내에서만 대출받을 수 있는 차주별 DSR 1단계가 시행 중이다. 차주가 연봉 5000만원인 직장인이라면 연간 원리금 상환액이 2000만원을 넘지 못하도록 대출 한도를 묶는 것이다. 올해 7월부터는 규제가 한층 더 강화해 1억원 초과 시 연소득 40% 내에서만 돈을 빌릴 수 있게 된다. 소득이 낮으면 대출받기가 더 어려워지고, 집 사기도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대출 만기를 35년에서 40년 등으로 더 늘리면 차주 입장에서는 은행에 매달 내야 하는 원리금 부담을 더는 효과가 생기고, 대출 여력을 좀 더 확보할 수 있다. 은행 입장에서는 돈을 더 빌려줄 수 있고 더 길게 이자 장사를 할 수도 있는 격이다.

쉽게 말해 은행에서 4억원을 빌려 집을 구매할 때 대출 만기가 10년이면 1년에 4000만원의 원금과 이자를 매달 갚아야 하는데, 만기가 40년이면 1년에 갚아야 하는 원금은 1000만원이 돼 매달 갚는 돈을 줄일 수 있다. 또 월 원금 상환액이 줄어들면서 월소득에 차지하는 비율이 그만큼 줄어 대출 여력을 더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업계에 따르면 은행은 7월부터 한층 강화한 DSR 규제 시행을 앞두고 ‘10년 분할상환 신용대출’도 검토 중이다. 현재 신용대출은 1년 만기 일시상환 방식이 대부분이고, 분할상환 최장 만기도 5년인데, 이를 최대 10년으로 늘리는 방안이다.

은행권이 나서 DSR 규제 장벽을 ‘초장기 대출 상환’으로 뛰어넘겠다는 것인데, 가계 부채 급증을 막으려는 DSR 규제 취지에 역행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이와 동시에 인위적인 DSR 규제 자체가 시장에 초래한 부작용이 크고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B은행 관계자는 “은행의 대출 만기 연장은 금리 인상 부담 속 대출을 받아야 하는 수요자들과 영업을 이어가야 하는 은행의 필요가 부합하면서 생겨난 일종의 대안”이라고 말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올해 들어 감소세를 보였던 가계대출이 4월 들어 다시 늘며 반등하고 있다”면서 “서울 주택 공급이 불안한 상황에서 새 임대차법에 따른 계약 만기가 도래하는 시점에 초장기 주담대를 이용해 집을 사려는 실수요가 늘면서 가계 대출 증가세가 이어질 수 있고, 가계 부채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여지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새 정부의 LTV 대출 규제 완화와 은행권의 대출 만기 연장에도 가계대출 증가 폭이 크지는 않을 것이란 반론도 있다. 시장의 금리 인상 체감 부담이 커졌다는 이유에서다.

한 은행 관계자는 “금리 인상 속도가 빨라 시장의 투자 심리가 위축된 상황이라 가계부채 증가 속도는 1~2년 전보다 둔화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앞으로 금리 인상과 DSR 규제가 주택 시장에 미칠 영향력이 가장 크다”면서 “만약 새 정부가 DSR규제 강화 기조를 계속 이어가고, 금리가 현 수준보다 2% 이상 더 오를 경우 주택 시장에 큰 충격이 올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일각에서는 DSR제도를 실효성 있게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한 은행권 부동산 전문가는 “주택 가격을 잡기 위해 강화한 LTV·DSR규제, 임대차법 등이 쏟아지면서 대출 레버리지(지렛대)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자산 격차는 더 벌어졌고 주택 시장의 불안과 양극화, 계층 간 갈등을 심화시켰다”면서 “연소득이 상대적으로 적더라도 미래 상환 능력이 있는 청년과 맞벌이 부부 등 주택 마련 실수요에 대한 DSR 기준을 완화해 제도를 현실에 맞게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