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등한 집값과 가계 부채를 잡기 위해 문재인 정부가 조인 대출 규제 나사를 윤석열 정부가 다시 풀 것이란 전망이 커지는 가운데, 정권 교체 속 은행들의 대출 기조가 묘하게 엇갈리고 있다.

4대 시중은행 중에서 우리은행이 선제적으로 전세자금 대출 한도를 임차보증금 80% 이내’로 늘리는 등 전세 대출 문턱을 낮췄다. 반면 신한은행과 하나은행, KB국민은행은 당국의 ‘답’을 기다리며 전세 대출 완화 시기를 검토 중이다.

22일 은행업계에 따르면 금융당국이 가계부채 관리 강화 정책에 따라 주택 담보 대출 등을 비롯한 가계 대출 총량 관리를 하는 가운데, 은행들도 전세 대출 한도 상향 등 대출 정상화 시점을 두고 혼란이 있는 모습이다.

21일 오후 서울시내 한 시중은행 대출상품 관련 안내문. 2022.3.21/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내놓은 청년과 무주택 실수요의 주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금융 정책 관련 공약에 따라 차기 정부는 ▲가계대출 총량 관리 폐지 ▲주택담보대출 비율(LTV) 상향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 축소 등 대출 규제 완화 조치를 추진할 것이라는 게 금융업계의 전망이다.

이에 앞서 지난해 10월 은행들은 금융당국의 규제 기조에 맞춰 가계대출 수요 억제를 위해 3가지 자율규제 대책(▲전세 계약 갱신 시 전세 대출 한도를 전셋값 증액분까지 제한 ▲잔금 지급일 이전까지만 대출 신청 가능 ▲1주택자의 경우 비대면 대출 신청 금지)을 내놓으며 전세 대출 문턱을 높인 바 있다.

최근 각 은행에서는 금융당국의 대출 규제 변화가 유력한 데다 봄 이사철 대출 수요를 선점하는 게 중요한 상황이니 전세 대출을 풀자는 의견과 금융당국과 은행연합회의 답을 기다린 뒤 시행하자는 의견이 분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엔 은행들이 전·월세 대출 시장을 놓고 벌이는 경쟁이 한층 더 치열해진 업계 상황이 반영됐다. 지난해 저금리 기조와 대출 증가로 역대급 이익을 거둔 은행업계에서는 금리 인상과 부동산 시장 거래 감소 등의 영향으로 올해는 가계대출 실적이 감소할 가능성을 걱정하는 상황이다. 가계대출은 이자 이익과 직결된다.

가계 대출 시장이 빠르게 얼어붙어 자율 규제 대책을 고수할 명분도 사실상 사라졌다는 점도 대출 조건 완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한국은행이 이달 발표한 ‘금융시장 동향’에 따르면 올해 2월 말 기준 은행 가계대출 잔액은 1060조1000억원으로 1월 말보다 1000억원 줄었다. 지난해 12월(-2000억원), 올해 1월(-5000억원)에 이어 3개월째 감소했다.

한 은행 관계자는 “집값 급등과 금리 인상으로 매수 심리가 위축되면서 올해 들어 가계 대출이 저조해 이사 수요가 늘어나는 봄 성수기를 앞두고 전·월세 대출 시장을 잡는 게 더욱 중요해졌다”면서 “올해 상반기 은행들의 가계대출 성적이 내년 경영 성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시중은행에서는 우리은행이 가장 먼저 전세 대출 한도를 복원하고 신규 대출에 특별 우대금리를 신설하는 등 전세대출 세 가지 자율규제를 모두 풀고 대출 문턱을 낮췄다.

우리은행은 전날부터 임대차계약 갱신에 따른 전세자금 대출 한도를 현행 ‘임차보증금 증액 금액 범위 내’에서 ‘갱신 계약서상 임차보증금 80% 이내’로 변경했다. 예를 들어 전세보증금이 기존 4억원에서 6억원으로 2억원 오른 경우 기존에 전세 대출이 없는 차주는 최대한도가 2억원이었는데 이날부터 보증금(6억원)의 80%인 4억8000만원까지 대출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은행은 전세 대출 신청 기간도 늘렸다. ‘신규 계약서 상 잔금 지급일 이전’에서 ‘잔금 지급일 또는 주민등록 전입일 중 빠른 날로부터 3개월 이내’로 늘린 것이다. 계약 시 전세 대출을 받지 않고 지인 등으로부터 돈을 빌리거나 자력으로 전셋값을 낸 고객이라도 입주 뒤 3개월 이내에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된 셈이다.

부부 합산 1주택자의 경우 비대면으로 대출을 신청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신규 대출에 0.2%포인트(p)의 특별 우대금리를 신설했다. 오는 5월31일까지 주택·주거용 오피스텔 담보 대출인 아파트론·부동산론과 우리전세론, 우리WON주택대출을 받은 경우가 대상이다.

우리은행이 전·월세 대출 시장 선점을 위해 다른 은행보다 빠르게 대응하며 공격적인 영업에 나선 것이란 진단이 나온다. 우리은행 측은 “전세 대출 수요자들의 금융 불안을 해소하고 전·월세 시장 정상화에 기여하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반면 KB국민은행, 신한은행 하나은행은 전세 대출 규제 완화 시점을 검토 중이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현시점에서 전세자금대출 한도로 임차보증금의 80% 이내로까지 상향할 수 있는지 등을 은행연합회에 질의해둔 상태”라며 “정확한 지침 아래에 대출 상품을 운용하고자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최근 은행들의 움직임을 두고 일각에서는 정권교체기에 관치금융(정부의 시장 개입) 관행과 금융당국과 시장 간 소통 지체 현상이 드러났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은행들이 그동안 정부의 대출 정책과 주문에 따라 대출을 운영해왔다 보니 자체적으로 판단해 영업하기보다는 눈치를 보면서 확인하려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정권 교체 시점이라 금융위원회와 은행연합회에서도 명확하게 답해주지 못하는 등 소통에 한계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