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지주 회장직의 '3연임 이상' 수행이 공식처럼 자리 잡는 분위기다. 한명의 회장이 10년(임기당 3년)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금융그룹의 수장 역할을 도맡아 하는 일이 흔해졌단 말이다.
금융감독당국은 권력 집중의 이유로, 한때 금융지주사 CEO(최고경영자)의 연임 관행을 강력하게 제재하는 등 달갑지 않아 해왔다. 이런 시선에도 불구하고 CEO의 장기집권이 그룹의 중·장기적인 업적 달성에 도움이 된다는 공감대가 금융권 내에서 형성된 것으로 풀이된다.
10일 금융권에 따르면, 우리금융은 최근 우리은행의 차기 행장으로 이원덕 우리금융 부사장을 내정했다. 권광석 우리은행장이 임기 2년 만에 퇴진하게 된 것이다. 통상 시중은행장에 대해 '2+1′ 형태로 3년 임기를 보장한다는 점과 권 행장의 성과 등을 고려하면 이례적인 교체였다.
◇ 우리은행장 이른 교체, '손태승 3연임' 밑 작업이었나
금융권과 정치권에서는 우리금융의 회장-행장 간 불화가 원인이 됐다는 설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우리금융의 이런 '집안싸움'은, 한일은행·상업은행이 합병해 탄생했다는 태생적 한계 탓에 매번 반복돼 온 역사이기도 하다. 실제로 손 회장은 한일은행, 권 행장은 상업은행 출신이다.
이번 교체를 두고 2023년 두번째 임기 만료를 앞둔 손태승 회장이 3연임 수행을 위한 준비에 본격적으로 돌입한 것이란 해석이 나오고 있다. 권 행장의 뒤를 이을 이원덕 내정자는 같은 한일은행 출신인 데다가, 손 회장의 복심으로도 꼽히는 인물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두 사람은 그간 완전 민영화 등 중요 의사결정 과정에서 손발을 맞춰 왔다"며 "이 내정자의 경쟁력 얘기는 차치하고서, 회장·행장 '원팀' 체제를 구축해 손 회장의 그룹 장악력에 더욱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 아니겠느냐"라고 했다.
우리금융은 최근 지주사 사장직 신설 방안도 함께 발표했는데, 이 역시 손 회장의 지배력 강화에 도움이 될 거란 시각이 제기된다. 이 내정자와 함께 숏리스트(최종 후보군)에 포함됐던 박화재 우리은행 여신지원그룹 부행장과 전상욱 리스크관리그룹 부행장보의 임명이 예고된 상황이다. 회장과 함께 호흡하고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는 역할을 둬 그룹 내 적극적인 결집을 도모하겠단 의도로 분석된다.
◇ "5년 전 비교, 분위기 변해"… '국룰' 된 CEO 3·4연임
금융지주 회장직을 3연임 이상 수행하는 사례는 이미 여타 그룹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김정태 하나금융지주 회장은 4연임을 끝으로 2012년부터 이어 온 회장직을 내려놓을 예정이다. 윤종규 KB금융 회장도 2014년부터 3연임 째 수행 중인데, 이를 끝으로 물러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나 4연임의 가능성도 아주 닫혀 있는 것은 아니다. 손태승 회장과 같이 2023년 두번째 임기를 마무리하는 조용병 신한금융 회장 역시 나이 등을 고려할 때 아직 3연임 도전 가능성이 열려 있다.
과거 라응찬 전 신한금융 초대 회장(4연임·2001~2010년), 김승유 전 하나금융 초대 회장(3연임·2005~2012년) 등 장기집권 이후 금융지주 CEO의 장기 연임 관행은 자취를 감추는 듯했다. 2017년 최흥식 당시 금융감독원장은 CEO 승계 프로그램 등 지배구조에 대해 연일 질타했고, 금융지주 회장들이 경영진 인선 과정에 직접 참여해 스스로 연임을 이어가는 이른바 '셀프 연임' 문화를 뜯어고치기도 했다.
비합리적인 인선 관행을 바로잡는 과정이었지만, 연임 자체에 대해 금융당국의 눈치를 보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다. 연임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금융지주 회장의 연임을 '1회, 최대 6년'으로 제한하는 법을 지난달 발의했다.
하나·KB·우리 등 최근의 달라진 추세는, 지주 회장의 장기 재임을 실적과 연관 지어 거의 필수적인 요소로 여기는 금융권 내부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한 금융지주 관계자는 "하나금융도, KB금융도 회장의 임기가 길어질수록 그룹의 당기순이익이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으며, 주 계열사인 은행의 실적도 이를 따라가는 모양새"라며 "짧은 임기 동안 단기적 성과에 매몰되기보단, 중·장기적 목표 달성을 위해 한 사람이 쭉 조직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일관성과 추진력도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금융지주 회장의 장기 집권 문제는 앞으로 주요 논란거리로 번질 수 있단 전망이 나온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소액주주의 견제 기능이 약한 한국 풍토 위에서 별다른 경영 평가 없이 금융그룹 수장의 장기집권이 가능하게만 방치해 둔다면 여러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다"며 "2017년 이후 뚜렷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는 금융당국에도 고민거리로 부상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