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기업은행(024110)에서 76억원 규모의 ‘셀프 대출’ 사건이 발생해 윤종원 행장이 유사 사건 재발 방지를 약속했으나, 1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부 통제 전산 시스템을 마련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개보위)에서 소속 임직원 가족의 개인 정보와 대출 정보를 대조하는 방식이 법적인 문제가 있다고 판단 내리면서 시스템 마련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개보위 문턱에 걸린 것이기는 하나, 이에 대한 기업은행 차원의 대안도 따로 없어 사건 발생 1년여째 빈틈이 그대로라는 비판은 피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12일 금융권 등에 따르면 기업은행 소속 임직원 가족의 대출 업무 관리를 위한 시스템 개발이 최근 무산됐다. 이는 직원의 채용이나 연말정산 과정에서 수집한 가족의 성명·생년월일·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정보를 대조해 대출 신청자가 직원의 가족인지를 검증하고, 가족인 경우 해당 업무를 직원 본인이 관여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 시스템이다.

윤종원 기업은행장이 지난해 10월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의 신용보증기금, 한국산업은행, 중소기업은행, 서민금융진흥원등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당시 윤 행장은 "은행원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발생했다. 임직원 모두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연합뉴스

이번 시스템 개발은 지난해 불거진 셀프 대출 사건에 대해 기업은행이 약속한 후속 조치였다. 앞서 경기 화성시 소재 기업은행 영업점에서 근무한 A 차장은 2016년 3월부터 지난해 상반기까지 가족이 운영하는 법인 등을 통해 총 76억원을 대출받았다. 셀프 대출된 76억원으로 경기도 일대 아파트·오피스텔·연립주택 29건을 매입해 막대한 차익을 남겨 당시 큰 파장을 일으켰고, 이에 은행장도 직접 나서서 재발 방지 시스템 마련을 약속한 바 있다.

개보위 소위원회 회의록 등에 따르면, 공공기관 자격인 기업은행은 이를 위해 임직원 가족의 개인정보를 활용하는 것이 법적인 문제가 없는지를 지난해 11월 19일 개보위에 질의했다. 개보위는 지난 4월부터 수차례 소위원회를 열어 해당 안건을 논의했다. 하지만 약 1년 논의 끝에 결국 ‘활용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지난달 말 해당 안건을 종결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개보위는 우선 가족의 부정 대출을 판별하기 위한 기업은행의 개인정보 활용은 ‘수집 목적의 범위를 초과하는 목적’이 된다고 판단했다. 목적 외에 정보를 이용하려면 은행법 등에서 정하는 해당 업무를 부득이하게 수행할 수 없다는 점이 인정돼야 한다. 그러나 개보위는 이 역시 인정할 수 없다고 봤다.

개보위 측은 “은행 직원이 가족 대출을 취급했다고 해서, 반드시 정상적인 범위를 초과해 재산상 이익을 제공한 ‘불건전 영업 행위’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기업은행은 대출 한도가 과도하게 높거나 금리가 지나치게 낮은 경우 이를 점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민간은행의 경우처럼 이상(異常) 대출의 경우 대출 취급자가 상부에 자진 신고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가족 관계 여부를 확인해 문제를 차단할 수 있다고 봤다. 불건전 영업 행위를 걸러낼 대안이 있으니 예외로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다.

결과적으로 1년 전 유사 사례의 재발을 방지하겠다던 기업은행의 약속은 공염불이 됐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기업은행 측은 당시 “유사 사례를 조사해 적발될 경우 예외 없이 원칙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면서도 “직원과 배우자의 친인척에 대한 대출 취급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내부 규정과 전산 시스템을 마련하고, 모든 대출에 대해 직원의 친인척 여부를 상시 모니터링 할 계획”이라는 대책을 내놨었다. 이번 개보위 결정으로 후자의 경우 사실상 실행할 수 없게 된 셈이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대출 심사 시 고객이 임직원 친인척인지를 체크할 수 있는 항목을 마련해 두었고, 임직원 역시 자신이나 동료 직원의 친인척 대출 여신 상담을 담당했을 시 이를 파악해 준법감시인에 보고하게 돼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해당 내부통제 전산 시스템을 마련하지 않고도 충분히 임직원 가족의 불건전 대출을 걸러낼 수 있다는 개보위 측의 인식도 다소 안이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상 대출 모니터링과 임직원 가족 대출의 자진 신고를 바탕으로 하는 방식이 민간 시중은행에서도 내규에 의해 시행되고 있지만, 유사한 사례는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이정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금융감독원에서 제출받은 ‘국내 은행 금융 사고 현황’ 자료에 따르면, 은행 임직원이 본인과 지인 명의로 불법 대출을 받아 주식에 투자하는 등 은행 금융사고 피해액이 최근 5년간 177건(1540억원)에 달한다. 올해에도 지난 8월까지 22건(247억원)이 발생했다. 한 은행 관계자는 “내부 감사, 자진 신고, 처벌 강화 등의 장치가 있다고 해도 여신 업무 담당 직원이 악의만 가지면 유사한 일은 충분히 벌일 수 있는 현실”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