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화폐, 스테이블코인, 거대 기술 기업(빅테크)'

국제결제은행(BIS)이 지난 6월 발간한 2021년 연차 경제 보고서(BIS Annual Economic Report 2021)는 각국 중앙은행들이 디지털 화폐를 시급히 준비해야 하는 이유로 이 세 가지 기술 혁신을 꼽았다.

보고서는 특히 빅테크 금융산업이 가져올 문제점을 상세히 다루었다. 중앙은행의 CBDC 도입에는 빅테크와 주도권 다툼이 있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다.

중국 인민은행은 지난해부터 중앙은행 디지화폐(CBDC)인 '디지털 위안'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베이징로이터연합뉴스

비트코인·이더리움 등 순수한 암호화폐에 대해서는 "화폐보다는 투기성 자산에 가깝다"라고 두 문장으로 일축했다. 미국 달러화 등 실물 자산에 그대로 연계되는 일종의 증권형 토큰인 스테이블코인에 대해서는 한 문단을 할애했다.

BIS는 "통화 시스템의 유동성 공급 기능을 파편화시킬 잠재력이 있다"면서도 "궁극적으로 게임 체인저가 아니라 전통적 통화 시스템의 부속물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거대 기술 기업의 금융산업 진입에 대해서는 그 뒤로 6개 문단에 걸쳐 상세히 분석했다. 특히 '데이터-네트워크-활동'의 DNA 순환 구조(Data-Network-Activities loop)를 핵심으로 하는 거대 기술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이 금융 산업과 이용자들의 금융 서비스 접근성에 미칠 영향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결국 각국 중앙은행들의 CBDC 도입이 금융 산업까지 영역을 확대한 거대 기술 기업에 맞서기 위한 성격이라는 것을 드러낸 셈이다.

◇"금융산업 주도권 넘어가면 빅테크판 대마불사 불 보듯"

BIS는 금융안정성, 시장 건전성(financial integrity), 소비자 보호라는 측면에서 빅테크의 금융산업 장악이 심각한 문제를 가져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효율성 및 공정한 경쟁 측면에서도 기존 금융회사와 경쟁을 하겠지만, 빅테크의 시장 장악력이 커지면 독과점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봤다.

아구스틴 카르스텐스 BIS 사무총장은 "빅테크가 정책 결정자들을 곤란하게 만들 것임이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빅테크의 독과점 친화적 속성 자체가 문제라고 BIS는 지적했다. 보고서는 알리바바와 텐센트 2개 회사가 모바일 결제 시장의 94%를 장악한 중국 사례를 들었다. 빅테크가 금융산업에서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면, 각종 수수료가 높아지면서 디지털 금융에 소외된 사람이 생기고, 데이터 프라이버시 측면에서도 심각한 논란이 불거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BIS 등 중앙은행이 빅테크를 비판적으로 보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고 지적한다. 빅테크가 금융산업 내에서 독과점적인 지위를 차지하면, 결국 금융의 거시안정성(macro-prudentiality)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김진일 고려대 교수는 "빅테크가 금융산업을 장악하면 대마불사(大馬不死)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산업이 위기에 닥쳤을 때 빅테크를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도와줘야 하고, 이것이 빅테크의 도덕적 해이를 야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미국 FRB(연방준비제도 이사회)에서 10년을 근무한 중앙은행 전문가다.

◇ 페이스북·애플·아마존 등 빅테크 기업 가상자산 시장 진출

빅테크들은 스테이블코인 등 가상자산 기반 금융기법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다. 지금도 가상자산 시장은 규모는 크지만, 고만고만한 기업이나 개인이 참여하고 반(半)합법적으로 운영되는 데 그친다. 자본시장 규제로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빅테크가 가상자산 기반의 금융 서비스를 내놓으면 중앙은행이 관리하는 전통적인 통화·금융 시스템은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다.

페이스북은 스테이블코인 형태의 가상자산 디엠을 개발해 사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샌프란시스코AFP연합뉴스

가장 적극적인 곳은 미국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회사 페이스북이다. 페이스북은 지난 2019년 달러화, 유로화, 엔화 등 국제 법정화폐로 구성된 통화 바스켓에 연동되는 단일 가상화폐 '리브라'를 출시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초 2020년 출시 목표였는데, 각국 금융 당국의 반발에 결국 무산됐다. 페이스북은 최근 리브라를 디엠으로 개칭하고 다시 스테이블코인 프로젝트를 재가동했다.

페이스북은 하루 이용자가 20억명을 넘는다. 디엠이 페이스북 내 결제에 활용되면 사실상 국제 통화가 하나 더 늘어나게 되는 형국이다. 페이스북은 인스타그램·왓츠앱 등 계열사 서비스까지 포함해 전자상거래·송금 등의 금융서비스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애플과 아마존도 가상자산 시장에서 보폭을 확대하고 있다. 애플은 지난 5월 가상화폐를 포함한 대안적 결제 협력사와 파트너십을 체결할 임원을 선임하고 밝혔다. 아마존은 지난달 디지털화폐 및 블록체인 전략, 제품 로드맵을 개발할 제품 리더를 찾는다는 채용 공고를 올렸다. 아마존은 "미래가 현대적이고 신속하며 저렴한 결제를 가능하게 할 신기술 위에 구축될 것으로 믿으며 그 미래를 가능한 한 빨리 아마존 고객에게 가져다주고 싶다"고 밝혔다.

◇ "스테이블코인은 사실상 은행권"… "강력 규제하던가 없애야"

각국 중앙은행은 스테이블코인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이다. 따라서 페이스북 등의 스테이블코인 발행이 결국 무산될 가능성이 상당하다.

기본적으로 중앙은행은 스테이블코인이 약간의 지급준비금을 가지고 행하는 일종의 '신용창조'라고 보는 입장이다. 첨단 기술의 외피를 입혔을 뿐, 전통적인 은행 사업 방식과 유사하다는 게 중앙은행의 시각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게 지난 6월 개리 고튼 예일대 교수와 제프리 장 조지타운대 교수가 함께 쓴 '살쾡이 같은 스테이블코인 길들이기(Taming Wildcat Stablecoins)' 보고서다. 고튼 교수는 금융경제학 전공이고, 장 교수는 FRB 자문 변호사이면서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에서 일하는 등 금융규제 업무에 정통해있다.

이들은 스테이블코인이 19세기 미국에 중앙은행이 없었을 때 상업은행들이 알아서 발행하던 은행권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분석했다. 당시 상업은행들은 자체적인 지급준비금을 거론하며 자사 은행권의 안정성을 내세웠지만, 금융위기가 발생하면 지급불능 사태에 자주 직면했으며, 나아가 연쇄적인 지급 불능에 따른 금융공황도 빈번했다.

박선영 동국대 교수는 "스테이블코인은 달러화 가치 등에 연동된다고 하는 데 충분한 지급 준비 여력을 갖췄는지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언제든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고튼 교수의 지적은 고전적인 뱅크런(은행의 지급 여력이 신뢰받지 못할 때 한 번에 예금인출이 발생하는 것)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튼 교수와 장 교수는 스테이블코인 발행 및 유통 회사가 은행과 똑같은 수준의 지급준비 여력을 갖추도록 규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자기자본 비율이나 여신 건전성 등에서 금융기관 수준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것이 여의치 못할 경우 스테이블코인의 발행·유통을 막고, 중앙은행의 CBDC로 이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CBDC 행보 빨라지나… 은행 위상 축소 가능성도

두 사람의 보고서는 결국 중앙은행이 CBDC를 빠르게 확대하고, 또 중앙은행이 직접 개인 고객과 거래하는 방식을 취해야 한다는 얘기다. 현재 CBDC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논의된다.

먼저 금융기관에 공급하는 본원통화 등에서만 CBDC를 쓰자는 것이다. BIS는 이를 '도매(wholesale) 방식'이라고 지칭한다. 개인이나 기업은 신용카드나 계좌 이체 등을 통해 금융거래하는데, 이는 CBDC가 아니라 CBDC를 가지고 은행이 창출한 신용이다.

두 번째는 중앙은행이 직접 개인에게 CBDC를 공급하는 것이다. 이른바 '소매(retail)' 방식이다. 개인별 계좌를 개설해 여기에 CBDC가 저장되는 방식과 익명성이 담보되는 증권형 토큰 형태로 발행·유통되는 방식 등 소매 방식 유형은 여러 가지다. 이 밖에 소매 방식이긴 하되 중간에 전자결제업체를 끼는 방식도 논의된다.

/국제결제은행(BIS)

소매 방식을 취할 경우 금융 중개 기관으로서 은행의 위상은 축소된다. 중앙은행과 개인·기업 간 거래가 직접 이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또 마이너스 이자율을 붙이거나, 사용·기간·범위·지역 등을 제한하는 형태도 가능하다.

한국은행의 경우 최근 검토한 CBDC 보고서에 마이너스 이자율이 법률적으로 가능한지 검토하는 내용을 담았다. 중앙은행이 개인의 금융 거래 정보를 직접 관리하게 되면 프라이버시 논란도 불붙게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