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을 계기로 지난 2~3년간 가상자산 가격이 급등하고 관련 시장이 팽창했다. 이러한 양적 성장은 가상자산을 이용한 금융 상품의 개발 및 판매라는 질적 변화로 이어지며 새로운 유형의 가상자산도 생겨났다. ‘빅 테크’라 불리는 거대 기술기업이 가상자산 시장 진출을 모색하고 있기도 하다. 이에 대응해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본격적인 금융 규제 도입을 검토하는 추세다. 금융 시스템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중앙은행의 디지털화폐 도입도 가속화되고 있다. 일종의 교차점에 선 가상자산 시장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성과급에 대출받은 1억이 반 토막 나서 그냥 이자 농사 시작. 이자 농사는 그래도 원금은 보장되니 다음 불장 올 때까지 맘 편하게 이거나 갈아놓아야겠다 싶어서. 하루 50달러 정도 나오더라. 한 달이면 180만원 돈 나온다. 이런 장에선 디파이가 최선인 듯. 다들 하락장 대응 잘하길.”

최근 직장인들이 많이 참여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지난해 하반기부터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단어는 ‘이자 농사(yield farming)’다. 이자 농사는 투자자가 보유한 가상자산을 가상자산 금융중개 서비스 업체에 예치하고 대가를 받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형태의 가상자산 금융 서비스는 대여한 가상자산을 다른 투자자들에게 다시 빌려주고, 이에 대한 대가로 수취한 이자 중 일부를 기존 대여자에게 수익으로 되돌려준다. 가상자산 종류와 중개 서비스 업체에 따라 다르지만, 수익률이 매우 높아 지금도 인기를 끌고 있다.

서울 용산구 코인원 고객센터에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 시세가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여기서 가상자산 금융 중개 서비스 업체는 대부분 디파이(Defi·Decentralized Finance)라 불리 우는 탈중앙화된 금융 기술을 기반으로 한 플랫폼 비즈니스 형태를 띠고 있다. 이들은 가상자산과 마찬가지로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하며, 플랫폼이 발행한 토큰(디지털 증서)을 이용한 자동화된 ‘투표’ 방식으로 운용된다.

가상자산 대차 거래에 따르는 수익률 산정과 정산도 자동시장조성자(AMM·Automated Market Maker)라는 알고리즘에 따라 이뤄진다.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가상자산에서 쓰이는 것과 거의 동일한 기술을 활용해 자금을 빌려주고, 파생금융 상품을 중개하며, 이를 위해 이용자의 가상자산을 잠깐 빌려다 쓴다. 투자자 관점에서는 일종의 금융 상품을 구매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얼핏 보면 바이낸스 등 해외 가상자산 거래소가 제공하는 스테이킹(staking·예치) 서비스와 유사한 것 같지만, 실제 투자 기법을 보면 차이가 존재한다.

먼저 디파이 네트워크 참여에 따른 보상으로 지급하는 토큰도 가상자산으로 거래된다. 또 2개의 서로 다른 가상자산을 쌍으로 묶어서 예치하는 경우가 상당수다. 두 가상자산의 교환 비율(즉 가격)이 차이가 나게 되면, 차익매매 영향으로 해당 디파이 네트워크가 보유한 가상자산 비율이 변화한다.

두 가상자산 중 어느 한 쪽의 가격이 급등락할 경우 투자자는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다. 플랫폼이 유지될 수 있을지에 대한 신뢰성 문제는 기본이다. 이에 따라 ‘농사’라는 어감과 달리 이 같은 투자는 변동성 큰 원자재 선물옵션을 매도하는 포지션을 취하고, 그 대가 중 일부를 주식연계워런트(ELW)로 받는 것과 유사하다.

디파이라 불리는 가상자산 기반 금융서비스는 2020년부터 급성장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최근 가상자산 시장을 관통하는 단어가 있다면 ‘금융화’다. 지금까지는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가상자산 채굴, 거래, 상장 등이 가상자산 시장의 중심에 있었다. 가상자산 진영은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은 기존 금융질서를 전복하는 ‘화폐’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각국 정부가 가상자산에 대한 규제를 도입하면서 금융시장의 일부로 통합되는 초입에 접어들었다.

또 가상자산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금융기법이 도입되고 있다. 기존 화폐 가치를 그대로 반영하는 스테이블코인이나 주식·채권과 연계된 증권형 토큰도 각광을 받으면서 빠르게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이러한 금융 거래는 파생금융상품 등을 대상으로 한 기존 규제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 ’화폐’에서 ‘자산’으로… 금융규제 본격화

가상자산 기반 금융 상품 규제에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나라는 미국이다. 게리 갠슬러 미국 SEC(증권거래위원회) 위원장은 이달 초 미국 싱크탱크 아스펜연구소가 주최한 콘퍼런스에서 가상자산 시장 규제 원칙을 밝혔다. 갠슬러 위원장은 “많은 플랫폼에서 가상자산(암호화폐) 금융이라는 용어가 쓰이는데, 그들 중 일부는 증권법뿐 아니라 상품법, 은행법도 적용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들 거래 플랫폼이 증권을 취급한다면 면제 사유를 충족하는 게 아닌 한 미국 법에 따라 증권거래위원회에 등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랫폼 회사를 겨냥해서는 “연방 증권법과 투자회사법의 결합을 통해 투자자 보호 효과를 분명히 낼 수 있다”고 말했다.

갠슬러 위원장의 이 같은 발언은 디파이 등 가상자산 기반 금융 서비스를 기존 금융회사 규제 체계 하에서 관리하겠다는 생각을 표명한 것이다. 그는 “어떠한 가상자산도 가치 저장 수단과 회계 단위, 거래의 매개라는 화폐의 세 가지 기능을 광범위하게 충족하지 못한다”고 했다. 가상자산 발행 및 거래도 금융거래로 보겠다는 것이다. SEC와 미국 상품거래위원회(CFTC)는 디파이 등의 규제를 위해 업무 협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0년 이후 디파이 예치 금액 추이. /한국은행

디파이는 지난 2017년 미국 메이커다오가 이더리움을 담보로 잡고, 달러화 가치와 일대일로 연동되는 가상자산인 다이(DAI)를 발행하면서 시작됐다. 메이커다오는 DAI를 기반으로 대출 서비스를 선보였다. 메이커다오 입장에서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해 레버리지를 일으키는 동시에 가상자산 가격 등락에 따른 손실 위험을 헷지했다. 대출, 보험, 파생상품, 금융상품 거래소 등 디파이 기반의 금융 서비스 플랫폼 회사가 등장한 것이다. 2021년 6월 말 현재 디파이 시장은 예치금(TVL·Total Value Locked) 기준 480억달러(55조원)으로 2019년 말 대비 68.8배 커졌다.

◇ 한국은 카카오 ‘클레이튼’ 기반 디파이 성장

한국에서 가상자산 기반 금융서비스는 카카오가 인도네시아에서 발행한 가상자산 클레이튼을 이용한 것이 대표 사례다. 클레이튼은 카카오의 일본 관계사 그라운드X가 발행했고, 이를 이용한 디파이서비스를 카카오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블록체인 회사 오지스가 여럿 내놓았다. 카카오는 가상자산 거래소 업비트를 운영하는 두나무의 지분 21.3%를 직간접적으로 갖고 있다. 창업자인 송치형 의장(25.4%)에 이은 2대 주주인 셈이다. 두나무는 카카오가 보유한 지분 등을 고려해 오지스 지분을 정리했는데, 오지스가 다양한 클레이튼 기반 금융 서비스를 내놓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여전히 ‘한 배’에 탄 것으로 가상자산 업계는 보고 있다.

오지스 관계자는 “클레이스왑에서 스왑 기능을 제공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클레이튼 기반의 토큰뿐만 아니라 이더리움이나 바이낸스코인 등 타 네트워크 기반의 토큰까지 다루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서 “클레이스테이션에선 기관뿐만 아니라 일반 클레이 보유자도 예치 기능에 참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클레이튼 기반 디파이 생태계 개념도. 개념도에서 클레이튼을 매수한 뒤, 이를 카이카스라는 월렛(가상자산 디지털 보관소)에 옮긴다. 카이카스도 클레이튼을 만든 카카오 계열사 그라운드X가 만들었다. 이를 클레이스왑이라 불리는 디파이 네트워크(왼쪽 위)에 맡겨 사실상의 파생상품 거래에 참여하거나, 클레이스테이션에 단순히 예치(스테이킹·왼쪽 아래)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익을 얻는 것을 이자농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최근에는 별개의 블록체인으로 나뉘어 있는 가상자산을, 자체적인 블록체인에서 교환할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인 오비트브리지(오른쪽 위)가 개발되고 있다. /코인원

가상자산 기반 선물·옵션 상품의 경우 가상자산 거래소 고팍스가 기초자산 가격보다 3배 더 등락하는 불(BULL) 토큰과 거꾸로 움직이는 베어(BEAR) 토큰을 내놓은 수준이다. 지난 2016년 가상자산 관련 마진거래 서비스를 내놓았던 코인원이 대부업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는 등 실정법 위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레버리지, 인버스, 선물 등 파생상품 거래를 하려는 투자자들은 가상자산 리플을 국내 거래소에서 매입한 뒤 바이낸스 등 해외 거래소로 보내고, 그곳에서 투자하는 방식을 쓰고 있다.

국내 가상업계 관계자들은 9월 25일 ‘특정 금융거래정보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특금법)’ 개정안 시행 이후 가상자산 기반 금융서비스 제도화 논의가 시작될 것으로 봤다. 김상진 하나금융연구소 연구위원은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가상자산 관련 제도 정비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이를 보완하기 위한 다수 법안이 국회에 계류하고 있다”고 전했다. 여기에는 가상자산 사업자 범주에 발행업까지 포함하는 것도 있다. 금융위는 가상자산 중에서 증권형 토큰의 경우 자본시장법을 준용한다는 방침으로 알려졌다. 한 금융위 관계자는 “가상자산의 증권성부터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디지털 아나키즘 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던 초기 가상자산 운동 정신에서 멀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 2009년 비트코인을 만든 사토시 나카모토는 비트코인 백서 맨 처음에 “우리는 전자화된 화폐를 디지털 서명의 연쇄고리로 규정한다(We define an electronic coin as a chain of digital signatures)”고 선언했다. 현재 각국 정부와 가상자산 산업 관계자들의 행보는 코인을 ‘화폐’가 아니라 ‘금융상품’의 일종으로 만들고 있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