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사들이 올 들어 줄줄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채권을 찍어내면서 지난해까지 이름조차 생소했던 ESG 채권 발행 규모가 역대 최대치를 찍을 전망이다. ESG 채권이란 환경, 사회, 지배구조 개선과 관련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되는 채권을 말한다.
일부 카드사는 이사회 안에 별도 위원회까지 꾸리면서 ESG 경영에 공을 들이는 분위기지만, 일각에서는 올해 있을 수수료 재산정을 앞두고 사회적 역할을 드러내놓고 강조하기 위한 조치라고 지적했다.
2일 카드업계에 따르면 KB국민카드는 지난달 10일 자사 채권 발행 사상 최초로 3억달러(약 3330억원) 규모 외화 표시 지속가능채권을 찍었다. 이 채권은 달러로 찍은 5년 만기 고정금리부채권이다. 발행 금리는 미국 국채 5년물 금리에 스프레드를 더해 연 1.50% 수준이다. KB국민카드는 이번에 확보한 자금을 저소득층과 사회 취약 계층을 상대로 한 금융 지원 사업과 기타 사회적 가치 창출 사업에 사용할 계획이다.
KB국민카드 관계자는 "지난달 초 아시아와 유럽 시장을 대상으로 수요 예측을 위해 비대면으로 진행한 투자설명회에서 60여곳 투자자들이 총 11억달러가 넘는 규모로 참여를 희망했다"며 "흥행에 성공하면서 최초 제시한 금리 대비 37.5bp(0.375%) 낮게 채권을 발행했다"고 말했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이 채권에 'A2' 등급을 부여했다. 투자적격등급 10단계 가운데 6번째인 '중상등급'에 해당한다.
롯데카드도 지난달 17일 4억5000만달러 규모 해외 자산유동화증권(ABS)을 소셜본드로 찍었다. 소셜 본드는 사회적 취약 계층 지원, 일자리 창출 등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발행하는 특수목적채권으로 ESG채권의 한 종류다.
롯데카드 관계자는 "국고채 3년물 수준 저금리로 발행했다"며 "적극적인 ESG 경영활동을 이어나가기 위해 국내외로 ESG 채권을 찍어 다양한 투자자를 확보하려 한다"이라고 밝혔다. 롯데카드 역시 이번에 조달한 자금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저소득층에 대한 금융서비스 지원에 쓸 예정이다.
두 카드사에 앞서 현대카드, 신한카드, 하나카드 같은 다른 전업 카드사들도 올 들어 ESG 채권 발행 규모를 폭발적으로 늘렸다. 지난해 일년 동안 주요 전업 카드사가 발행한 ESG 채권 규모는 약 1조6000억원이다. 올해는 이미 상반기가 지나기도 전에 2조원을 넘어섰다.
현대카드는 올 3월 4500억원 규모 그린본드를 찍었다. 그린본드는 친환경 에너지 개발이나 신재생 에너지 프로젝트에 쓰일 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찍는 채권이다. 현대카드는 현대·기아차의 전기·수소·하이브리드 차량을 포함해 친환경 차량에 대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조달 자금을 쓰고 있다.
업계 1위 신한카드 역시 올해 3월 2000억원 규모로 ESG 채권을 발행했다. 2019년 이후 신한카드의 ESG채권 누적 발행액은 총 1조2090억원에 달한다. 신한카드는 지난달 27일에는 카드업계 최초로 이사회에 ESG 위원회를 설치한다고 밝혔다. 사내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는 앞으로 ESG 관련 주요 전략 결정과 정책 수립을 직접 총괄하고 결정한다.
금융개발원 관계자는 "전 세계적으로 ESG 채권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지고 필요성에 공감하는 자본 투자자들이 늘면서, 신용등급이 좋은 여신사들이 이전보다 낮은 금리로 자금을 대거 조달할 길이 열렸다"며 "건전한 사업을 하고 있다는 착한 이미지를 쌓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카드사들이 갑자기 ESG 채권 발행을 서두르고, 이사회에 위원회까지 설치하며 의욕을 보이는 배경에는 올 연말 있을 수수료 재산정을 앞두고 카드사들이 사회적 역할을 드러내놓고 강조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고 평가했다. 금융당국과 카드업계는 지난 2012년 여신금융전문법 개정에 따라 3년마다 카드결제에 수반되는 적정원가에 기반해 카드가맹점 수수료율을 재산정한다. 올해는 2018년에 이어 수수료율을 재산정하는 해로, 현재 카드사 원가분석을 위한 태스크포스(TF) 팀이 이미 가동 중이다.
ESG 채권에 대한 개념이 아직 모호하고 일관된 발행기준이 없어 '사회적'이라는 명목을 대면 이리저리 유용이 가능하다는 것도 문제다. 카드사들이 저마다 ESG채권 표준 관리체계를 내세우고 있지만, 구체적인 항목을 뜯어보면 국제자본시장협회(International Capital Market Association)가 제정한 녹색채권 원칙(Green Bond Principles)이나 사회채권 원칙(Social Bond Principles), 지속가능채권 가이드라인(Sustainability Bond Guidelines) 기준을 두루뭉술하게 적용한 경우가 잦다.
한 카드업계 관계자는 "카드사가 지난해까지 쓰지 않던 대규모 자금을 ESG 채권을 찍어 모았는데, 이 자금을 채권 발행 목적과 무관한 사업에 쓰면 반대로 시장 신뢰를 잃을 수도 있다"며 "채권을 찍은 카드사가 발행 이후 투자 성과에 대해 사회책임보고서를 통해 공시하거나 임의로 발표하는 데 그치지 말고 최초 발행 목적에 맞게 자금을 집행했는지 외부기관을 통해 사후 검증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