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유가족들이 상속세 납부를 위해 수천억원 규모의 신용대출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시중은행들의 반응이 갈리고 있다. 삼성 일가의 탄탄한 신용도와 향후 삼성과의 거래 관계 등을 고려하면 놓칠 수 없는 영업기회다. 그러나 최근 가계부채 관리 기조에 일반 국민의 신용대출은 한껏 조여둔 상황에서 삼성 일가에만 특별 대출을 내줬다가 자칫 좋지 않은 여론이 형성될까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다.

29일 금융권에 따르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삼성 일가는 이 회장이 남긴 유산에 따른 상속세를 마련하기 위해 복수의 시중은행과 신용대출 절차를 진행 중으로 알려졌다. 삼성 일가가 내야 하는 상속세는 12조원가량으로, 지난해 정부가 거둬들인 상속세(3조9000억원)의 4배에 달하는 역대 최대 규모다. 삼성 일가는 이를 5년간 6번에 걸쳐 나눠낼 방침이다. 일단 오는 30일까지 2조원가량을 납부해야 한다.

삼성 일가가 추진 중인 신용대출은 수천억원 규모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해 배당금 수익이 상당하긴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상속세를 감당하기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실제 이 회장과 이 부회장, 홍라희 여사,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지난해 받은 배당금은 총 1조3079억원이다. 보유한 삼성 관련주를 매각해 현금을 마련할 수도 있지만, 지분 희석과 시장 영향 등의 우려로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10년 당시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가전전시회(CES 2010)를 찾은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가족들. 왼쪽부터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 전 회장, 부인 홍라희 여사, 차녀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전례 없는 대규모 대출인 만큼 이를 대하는 은행권의 반응은 엇갈린다.

먼저 삼성 일가의 신용도와 안정적 소득, 막대한 자산 등을 고려하면 리스크 적은 우량 대출이라 적극 유치해야 한다는 은행들이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리스크가 제각각인 일반 직장인 몇천명에게 1억원씩 신용대출을 내주는 것보다는 이 부회장 한명에게 수천억원 빌려주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며 “이번 대출을 내주는 은행은 그야말로 ‘대박’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 역시 “삼성 측에서 연락이 온다면 향후 삼성과의 거래 때문에라도 이번 대출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출 자체에 대한 리스크는 적지만, 그에 따르는 여론 반응 등에 따른 리스크가 우려된다는 반응도 있다. 최근 가계부채 관리 기조에 따라 시중은행이 신용대출을 조여 소비자 불만이 새어나오는 가운데, 삼성 일가에만 대규모 대출을 내줄 경우 여론이 우호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말부터 연봉 8000만원이 넘는 고소득자는 1억원 넘게 신용대출을 받을 때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40% 규제가 적용되는데, 시중은행들은 자체적으로 신용대출 최대 한도를 줄여 대부분 1억원 밑으로 신용대출을 내주고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물론 삼성 일가의 신용과 소득, 자산 등은 일반인과 비교하기 어렵지만, 전문직과 고소득 직장인 등 상환능력이 충분한 고객들도 신용대출을 받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삼성 일가에만 엄청난 한도와 낮은 금리로 대출을 내줄 경우 특혜 등의 논란이 벌어질 수 있고, 결국 그 평판 리스크는 은행이 오롯이 떠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은 지난 2017년부터 보수를 받지 않고 있다.

이에 삼성 일가에 수천억원의 신용대출을 내주기로 한 한 시중은행은 본부 차원에서 ‘여신 심사 협의체’를 열고 이번 건을 특별 승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기존 은행 규정으로는 취급할 수 없는 특수한 대출이기 때문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이번 같은 경우 대출 금액과 만기, 금리 등 모든 조건은 은행의 전략적 판단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며 “일반 고객의 신용대출에는 소득이 대출 산정 근거이지만, 삼성 일가의 경우 소득은 물론 자산 등 모든 측면을 복합적으로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들은 대규모의 특수한 신용대출인 만큼 이 부회장의 주식 등을 견질(見質) 담보로 책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견질 담보란 부동산 등 정식 담보로 인정하지 않는 것들이나 비공식 절차로 취득한 담보물 등을 말한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견질 담보는 향후 절차상의 문제나 미연의 사고 등을 고려해 형식적으로 담보를 책정할 때 쓰는 것”이라며 “특히 주식은 은행이 취급하는 담보에 포함되지 않는 만큼 이런 견질 담보는 한도 산정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했다.